창밖은 여름① 잘 싸는 것!

‘숨 고르기’와 ‘잘 바쁘기’

by 찐인구

18개의 알약. 한 움큼이다.


철분, 마그네슘, 비타민 등 각종 영양제부터 항우울제, 수면제에다 최근에는 제산제, 정장제, 모비졸로정, 아이오과립까지…. 약만 먹어도 배부르겠다는 말이 절로 나온다. 약의 개수가 하필 18개인 건 우연일까?


나름 건강에 대한 자부심이 컸다.

코로나19 때인 2021년 5월 15일부터 폴댄스를 시작했다.

그해 10월 13일부터는 하루 1만 보 걷기를 시작했으니 햇수로 따지면 벌써 5년째다.

골프 구력은 10년이다. 아직도 백돌이 벗어나기 어려운 실력이지만.


40대부터는 철저하게

체지방량 10kg대,

체지방률 10%대,

복부지방률 0.73,

내장지방레벨 2를 유지하고 있다.


특히 여성은 40대 전후로 근육량이 줄고 호르몬 변화가 생기면서 대사율이 급감하는 시기를 겪게 됨에 따라 기초대사량도 1400kcal를 유지하기 위해 나름 건강관리에 신경을 썼다. 기분에 의존하지 않고 습관을 만들고 루틴대로 살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웃기는 소리.

노력도 배신한다.

내가 산증인이다.


20년 직장 생활하면서 바쁘게 사는 걸 잘 사는 걸로 착각했다. 쉼 없이, 무작정 달리기만 하다 지난해 ‘썩은 사과’를 만나면서부터 내 삶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숨 고르기’와 ‘잘 바쁘기’를 못한 내 책임이 컸다.


살다가 나를 잘 모르는 사람에게 비난받는 것만큼 억울한 것이 없다.


올해 1월, 딱 죽을 만큼 억울한 일을 당하고 나서 정신건강의학과를 예약했다.

스트레스, 척도검사 등 1시간 넘게 각종 검사를 마친 후 조우한 젊은 여의사 앞에서 나는 기어이 옳고 틀리고를 증명해봐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 아니 그렇게 하기 위해서 선생님의 도움이 필요해서 병원에 왔다고 했다.


썩은 사과를 향한 복수를 위해 항우울제와 수면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고 나서 여덟 차례에 걸쳐 병원을 방문하는 사이 겨울과 봄이 지나갔다. 잠을 제대로 못 자는 지난한 시간을 통과하면서 ‘모두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괜찮은 여유로움’이 아주 조금 생길 때쯤, ‘용테크’ 절호의 찬스가 찾아왔다.


4월 6일 종합건강검진을 결과, 어디 성한 곳이 하나 없었다.

근육부자면 뭐 하고, 허리가 24인치면 뭐 하나.

비타민 D 심한 결핍상태, 시신경 이상, 망막 드루젠 병변, 빈혈, 신장 결석, 만성표재성 위염 등등.



창밖은여름-대장내시경1.jpg 2024년 5월 6일 대장용종 4개를 제거했다. 35년 지기 친구 S가 내 옆을 지켜주었다.




문제는 대장이었다.

용종이 무려 5개나 발견된 것. 대장내시경 검사 당시 용종 작은 것은 바로 떼어내 조직검사 결과 선종이었다. 담당의는 나머지 4개는 크기도 크기지만 용종 모양이 예사롭지 않다며 빨리 입원 일정을 잡자고 재촉했다.


이건 뭐지 싶었다. 암인가.


‘별이 5개, 장수 돌침대’는 들어봤어도 용종이 5개라니.


동료가 그랬다. “용종 5개면 용테크 좀 되겠는데요.”


용테크가 건강검진하면서 대장용종이 있을 시 제거술을 하게 되면 보험금이 들어온다 하여 붙여진 용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그래 우리 용테크 해서 소고기 사 먹자.”라고 쿨한 척 답했다.


수술 일정을 잡고 마냥 웃고 넘길 수 없었던 것은 장흑색증이 심한 대장 영상 CD의 잔상 때문이었다. 40대 여성의 대장이라 믿기지 않을 만큼 새까맣고 징그러웠다. 당장 암이라 해도 믿을 정도로 엉망진창이었다.


5월 6일, 용종 4개를 떼어냈다. 1개는 착한 종양인 ‘과증식성 용종’으로 전체 위용종의 90% 에 해당되며 대부분 2cm 이하로 크기가 작고, 암으로 진행되는 경우도 매우 드문 양성 종양이었다.


문제의 톱니모양 용종 3개는 10개 중 3개가 암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신생물성 용종으로, 반드시 제거해야 하는 용종이었다. 크기도 컸지만 편평한 형태에 정상 점막과 비슷한 색깔을 띠는 경우가 많아 발견하기 어려운데 장흑색증까지 심해 톱니모양의 용종을 제거하는데 꽤 어려웠다고 의사 선배가 말했다.


의사 선배는 대장운동 증가, 장내수분 촉진, 변비완화작용, 장내세균총 정상화 등에 좋은 약 네 가지를 처방해 주면서 “잘 먹고 잘 싸보자.”라고 말했다.


병원을 나오면 다짐했다. “참지 말고 버티지 말자.”

그리고 생각했다. “잘 싸는 것이 잘 사는 것이다.”


나는 요즘 평범해 보이는 삶을 산다.

최고가 아니어도 한 자리에서 버티는 힘으로.

18개의 약을 아침, 점심, 저녁으로 나눠 꼬박꼬박 잘 챙겨 먹는 미션을 수행하면서 아무 일 없는 것처럼 살아간다.


새벽에 일어나 사춘기 딸의 아침 밥상을 귀한 손님 대하듯 정갈하게 차려주고 출근길에 올라 라디오를 듣고 출근해 오전 내내 종종거리며 회의, 보고, 쓰고, 지우고, 기자들을 상대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직원들과 구내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고 정신없이 오후 업무를 처리하다 안암동으로 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잠시 눈을 감고 휴식을 취한다. 다리는 팅팅 붓고 땀은 흐르고 현기증으로 녹초가 된 몸이지만 이 허기짐, 이 초조함이 나는 좋다. 퇴근 후 저녁 7시 책상에 앉아 의료형법, 폭력범죄론, 경찰행정법 강의를 듣는 내가 꽤 근사해 보일 때가 있다.


오늘도 늘 하던 일을 계속하고 주어진 일을 묵묵히 견디며 계속 나아가는 중이다.

지루하고 답답한 일상 같지만 그 안에서 자책하지 않고 이제껏 달려온 나에게 손을 내밀어 줌으로써 멋있게 늙어가는 법을 배우고 있다.


가지 말라는데 가고 싶은 길이 있다.

만나지 말자면서도 만나고 싶은 사람이 있고

하지 말라면 더 해보고 싶은 일이 있다.

그것이 바로 나.

바로 나다.


6월, 낮이 많이 길어졌다.

내가 태어난 달이기도 하다.

나는 가고 싶은 길을 더 오래 걷고

더 해보고 싶은 일을 더 오래도록 하기 위해

더욱 나를 사랑해야 하겠다. 나를 말이다.


그리고 아픈 나를 그저 말없이 안아주고 싶다.

오늘 하루도 고생 많았다고,

그 복잡하고 머리 아픈 문제들 대해 걱정하느라,

참아내느라,

버텨내느라 애썼다고.


그리고 새벽 5시 일찍 일어나 무거운 몸을 이끌고 출근해 밥도 제때 챙겨 먹지 못하고 마감시간에 쫓겨 살았던 16년 동안의 시간들도, 행여나 남들에게 뒤처질까 전전긍긍하며 보냈던 그 수많은 시간들마저도 충분히 잘했다고 안아주고 싶다.


당분간은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는 일에 집중해야 하는 현재의 삶이 치사하고 추잡스럽기도 하지만 턱걸이 10개 정도는 가볍게 하고 탄탄한 빨래판 복근을 자랑하며 폴을 신나게 타는 60대 할머니, 그리고 헌법 전문을 달달 외우는 꽤나 멋진 할머니를 꿈꾸며 오늘도 나는 한 움큼, 18개의 알약을 꿀떡 삼킨다.


창밖은 여름, 약 먹기 딱 좋은 계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