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흔 이전의 나는 피동형으로 살았다.
바른 딸, 똑똑한 학생, 현명한 엄마, 지혜로운 아내, 착한 며느리, 근면성실한 직장인. 그 많은 역할들을 쉼 없이 갈아 끼우며 40년을 달려왔다. 돌아보니 남은 것은 이름 세 글자뿐이었다. 역할은 있었으나, 나는 없었다. 삶을 숙제처럼 살았다. 숨이 턱밑까지 차올랐지만 살려달라는 말은 끝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도망쳐야 했다. 헌법과 형법을 붙들고 앉아 있던 나는, 어쩌면 나를 정당화하기 위한 또 하나의 역할이었는지도 모른다.
2020년 12월 31일, 16년의 기자 생활을 내려놓았다. 더 늦기 전에 능동형 인간으로 살아보자 마음먹었다.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지금이 아니면 평생 타인의 삶을 대신 살다 늙겠다는 예감이 들었다. 두려웠다. 코로나 시국, 도망처로 택한 공직은 최선은 아니었지만 차선으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바이러스는 가난한 사람들을 가장 먼저, 가장 빠르게 덮쳤고 중산층마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그 와중에 공직은 무서울 만큼 조용하고 고요했다. 이렇게까지 편안해도 되나 싶은, 설명하기 어려운 죄책감이 스쳤다. 능동적으로 살아서는 안 되는 자리에서 능동형 인간을 꿈꾸는 나는, 결국 삶의 방향키를 잃고 말았다.
바이러스를 피하기에 공직사회만큼 적정하고 적당한 곳도 없었다. 마감 걱정도, 월급 걱정도, 승진 걱정도 없는 자리. 나는 그곳에서 비로소 편해질 줄 알았다. 아니었다. 늦깎이 공부를 할 물리적 시간을 확보한 것 말고는, 그 무엇도 나를 설레게 하지 못했다. 나는 바이러스와 ‘철밥통’이라는 말 사이에서 진심으로 일했다. 진심으로, 최선을 다해도 더 달라질 것 없는 자리에서 ‘딱 중간’만 하는 일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복지부동이 아니라 낙지부동. 붙으면 떨어지지 않는 자세를 매일 마주하며, 무사안일과 보신이라는 단어를 곱씹었다. 혁신은 구호였고, 열정은 눈치였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방향이 아니라 속도를 줄이는 법부터 배우고 있었다.
마흔에 시작한 꽉 막힌 공직생활. 폴은 내게 숨구멍이 되어주었다.
나는 폴을 타며 몸이 떨어지고 마음이 흔들렸다. 폴 수업은 그 흔들림을 반복하게 했다. 조용한 사무실보다 팔과 다리에 멍이 들고, 손이 까지고, 어느 곳 하나 성한 데 없이 아픈 그 공간이 오히려 더 편했다. 시끄러운 음악과 거친 숨소리 속에서 나는 비로소 살아 있다는 감각을 되찾았다. 폴은 단순한 운동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누구의 딸도,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직함도 아니었다. 오직 중심을 잃으면 바로 떨어지는 한 사람일 뿐이었다. 폴 위에서는 변명도, 연차도, 경력도 통하지 않았다. 몸이 준비되지 않으면 떨어졌고 마음이 흔들리면 미끄러졌다. 나는 처음으로 ‘잘 보이는 것’이 아니라 ‘버티는 것’을 배웠다. 매달려 있는 동안에는 과거도 미래도 없었다. 지금 이 팔의 힘, 이 복근의 떨림, 이 호흡만이 전부였다. 타인의 기준이 아니라 중력과 마주하는 시간. 나는 그 수직의 봉을 붙잡고, 비로소 내 삶의 중심을 다시 잡기 시작했다.
창밖은 여전히 겨울이다. 차갑고 마른 공기처럼, 폴도 늘 차갑고 단단하다. 나는 지난 5년 동안 그 차가운 봉을 맨손으로 붙잡았다. 손바닥이 벗겨지고, 팔과 허벅지에 멍이 들고, 근육이 떨려 더는 버틸 수 없겠다는 순간에도 끝내 놓지 않는 법을 배웠다. 폴은 나를 봐주지 않았다. 연약함을 핑계로 삼을 수도, 경력을 방패로 내세울 수도 없었다. 오직 몸의 힘과 마음의 인내만이 나를 지탱했다.
수없이 미끄러지고 떨어지며 알게 되었다. 단단함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차가운 것을 오래 붙잡은 사람에게 주어지는 감각이라는 것을. 나는 그 폴을 타며 내가 누구인지 묻기 시작했다. 내가 좋아하는 것, 내가 붙들어야 할 공부와 일, 그리고 어떤 얼굴로 늙고 싶은지 천천히 그려보았다. 몸의 근력보다 마음의 근력이 더 단단해졌다. 버티는 힘, 내려올 줄 아는 힘, 다시 오를 용기. 그 반복이 나를 조금씩 불러 세웠다.
나는 여전히 완전하지 않다. 여전히 흔들리고, 여전히 두렵다. 그러나 이제는 안다. 이름이 아니라 시간으로 나를 증명할 수 있다는 것을. 간혹 중심을 잃고 휘청이더라도 끝내 폴을 놓지 않는 사람으로 남고 싶다. 차갑고 단단하되, 오래 붙잡은 사람만이 아는 온기를 가진 어른으로. 이름은 여전히 나를 부르지만, 이제 그 안에 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