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밖은 여름③ 잘 타는 것!

고통과 권태 사이

by 찐인구



“봉이요?”

“아니, 봉이 아니고, 폴(pole)이요, 폴(pole).”

“아, 그러니까. 그 봉춤. 봉춤.”

“봉춤이 아니고.”

“왜, 그 막 긴 철봉 잡고 야한 옷 입고 막 민망하게… 막 추는.”

“막 추는 게 아닌데... 그래 봉춤, 봉춤 춘다.”


많은 사람들이 폴댄스는 몰라도 봉춤은 안다.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봉춤을 춘 개그우먼 박나래 덕분이지는 몰라도 예전에 비하면 많이들 알고 있다.

알긴 아는데 여전히 야한 춤 또는 웃긴 춤 정도 수준이다. 맨살 노출이 많은 의상 때문에 그런지 아직도 외설적이고 부정적인 이미지가 강한 게 현실이다. 근력, 유연성, 균형감각을 요하는 스포츠 운동에 대한 언급 또는 대중적인 극찬과 찬사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다들 질문이 한결같다.

“그런데 도대체 어떻게 올라가는 거야? 안 미끄럽나.”


내 대답도 한결같다.

“어떻게 올라가긴. 봉 타고 올라가지.”


다음 질문도 매번 같다.

“어떻게 매달려?”


내 대답도 매번 같다.

“폴에서 떨어지면 쪽팔리고 겁나 아파. 그래서 죽을 힘을 다해 매달리게 돼.”


다, 다음 질문도 일정하다.

“옷들은 왜 다 야한 거야? 코딱지만 하던데”


내 대답도 일정하다.

“네 코딱지는 그렇게 크냐? 폴댄스는 피부와 폴의 마찰로 하는 운동이야. 폴에 닿는 피부 면적을 최대화시켜야 해. 우선 짧고 딱 붙어야 부상위험이 적어.”


폴댄스에 푹 빠져 있는 동안 주변에서는 색안경을 끼고 쳐다봤다.

‘나만 즐거우면 됐지.’ 하는 생각으로 주변 반응은 신경 쓰지 않았다.



KakaoTalk_20250620_170611225.jpg 다리 찢기 학원까지 다니면서 지난해 4월 폴 프로필 촬영 때 성공한 '박스 스플릿' 동작




폴은 절대 쉬운 운동이 아니다. 강한 근력과 유연성을 필요로 한다.

고난도 동작일수록 그렇다.

폴은 아프다.

그냥 아픈 정도가 아니다.

존나 아프다.

상상 그 이상이다.


10명 중 5명은 체험수업 왔다 자신의 몸무게를 들어 올리지 못해 첫 수업 도중 포기하고 집에 간다.

나머지 4명은 아프다고 깩깩 소리만 지르다 간다.

나머지 1명이 바로 폴 생존자다.

내가 10명 중 1명에 해당하는 폴 생존자다.


폴의 다른 이름은 멍이다.

폴을 처음 타면 종아리, 허벅지, 팔꿈치, 오금, 겨드랑이, 발등, 어깨 등 온몸에 피멍은 필수다.

폴에 체중을 지탱하거나 특정동작을 할 때 피부에 가해지는 압력 때문에 혈관이 손상돼 멍이 생기기 때문이다.


평생 쓸 일 없는 곳들을 폴에 대고 버티고 비비고 빙빙 돌다 보면 피멍은 꽃처럼 피어난다.

살성 약한 부위는 멍이 더 화려하다. 또 몸을 제대로 쓰지 못하고 있을 땐 더 아프고 멍도 그만큼 크고 깊다.

폴과 내 살의 마찰로 하는 운동이기에 초보일수록 멍의 빈도와 강도, 깊이는 남다르다.

어디 맞고 다니는 사람처럼 팔다리뿐만 아니라 온몸이 난리가 난다.

멍과 굳은살이 생기는 건 애교다.


피멍과 피부 까임은 초보자의 통과의례다.

중급자부터는 근육통부터 손목, 등, 팔, 어깨 부상에 이어 추락으로 인한 다리 및 갈비뼈 골절, 요통, 늑골염좌, 어깨결림, 햄스트링 파열 등 고통의 레벨이 다르다. 초보자와 중급자 이상의 신체적 고통은 정도와 내용 그리고 치료 기간이 다르다.


까지고 피멍 들고 찢어지고 떨어지고 부러지고….

각종 부상을 감수하면서까지 햇수로 5년째 폴을 타는 나를 향해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받는 질문이 “봉 왜 타는 거야?”다.


“봉 아니고 폴(pole), 폴(pole)이라고.”

“그래, 폴. 너 몸치인 거 세상이 다 아는데 폴 왜 타는 거야?”

“‘저게 될까?’ 어제까지만 해도 안 되던 동작이 어느 순간 쉽게 되는 데서 오는 묘미가 커. 어려운 동작 하나하나, 마스터해 갈 때 성취감은 식구들 다 잘 때, 나 혼자 치킨 시켜 먹는 맛의 천배쯤. 만 배쯤.”

“야~ 완전 변태네.”


지인들로부터 가장 많이 듣는 말이 ‘변태’다.

시퍼렇게 멍들고, 살이 쓸리고, 뼈에 금이 가고, 부러지면서도

폴을 포기하지 않는 나의 인내심과 성실성은 변태로 치부됐다.



폴-부상의연속.jpg 폴 탈 때 멍과 굳은살이 생기는 건 기본.



변태면 어때. 쓰라림을 참고 시퍼렇게 멍든 팔, 다리를 보면서 ‘오늘 폴 탈 맛나네’ 혼잣말을 하는

내가 진짜 변태구나 느낀 때가 없었다고는 말 못 하겠다.


나는 공중에 있을 때 짜릿하다.

땅에서 빌빌 거리는 것보다

인간과 인간들 사이에서 비루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

폴에서 나만의 시간을 버틸 때 나는 누구보다 강했다.

때론 우아했다.


처음 폴을 딸 땐 단 2초도 버티는 게 어려웠다. 그냥 쪼르륵 내려오기 바빴다.

3초가 30초가 되고, 30초가 3분이 되기까지 꼬박 4년이 걸렸다.

4년 동안 오르고 떨어지고, 매달리고 돌고, 뒤집고, 걸고, 찢기를 무한 반복했다.

이제는 세로로 된 폴에 매달려서 거꾸로 서기, 다리 찢기 등 다양한 동작을 구현해 낼 수 있는 중급 정도 수준을 유지하고 있다.


2021년 5월 15일 처음 폴을 잡은 이후

드디어 2025년 6월 18일 폴 전문가반 10주 과정 수업을 시작했다.


“대단하다. 대단해. 재작년 여름, 강남 가서 돈 주고 다리 찢기 학원 갔을 때만 해도 또라이라고 생각했는데, 또 사고 쳤네. 돈이 썩어 남아도는구나. 몇 백만 원 주고 전문가반 수업을 듣는다고.”


“몇 년째 아주 봉이 미쳐서. 못 말린다. 못 말려.”


“그냥 내버려 둬. 작년 여름 기억 안 나? ○○이 강문해변에서 술 그렇게 마시고 머슬비치 링 탄다고 난리였잖아. 강릉에 바다 보러 가고, 회 먹으러 가지. 누가 링 타고, 밧줄 타고 철봉 매달리 가냐. 철봉 타러 가는 년은 처음 봤다니깐. 괜히 원숭이띠가 아닌가 봐.”


요즘도 친구, 지인들의 핀잔은 끝이 없다. 돈 한 푼 안 보태주면서 무슨 잔소리들이 그리 많은지.


나도 처음 알았다. 서울 강남 한복판에 다리 찢기 학원이 있다는 것을.

그것도 늘 대기가 많아 몇 달을 기다렸다 겨우 수업을 들을 수 있다는 것을 말이다.

폴댄스를 하면서 요가 학원 1년을 등록해 유연성을 키웠고, 강남에 스트레칭 학원까지 다니면서 주 1회 100분씩 다리 찢기(스플릿) 연습을 했다.


결국 2024년 4월 28일 그렇게도 안 되던 햄스트링과 고관절 박살 나는 기술 중 하나인 ‘박스 스플릿’으로 생애 세 번째 폴 프로필 촬영에 성공했다.

폴 위에서 가로로 다리를 쭉쭉 찢기에 성공했다.

그 순간, 나는 땅에서 목줄 하나 없이 질질 끌려다니던 내가 아니었다.



폴-피멍.jpg 땅에 발을 딛고 빌빌 거리며 사는 것보다 폴을 탈 때 나는 누구보다 강하고 당당하다.


딱 마흔에 직장과 직업의 변화를 겪었다.

나의 선택이었다.


내가 택한 길이었지만 하루하루가 시계추처럼 고통과 권태 사이를 오갔다.

폴은 타면 탈수록 굳은살이 생기고 근력이 붙었다.


그런데 늦깎이 공부를 시작하고 새로운 직장에 적응하면서 추락에 가속도가 붙었다. 자신감은 바닥이었다.

목표하는 바와 멀어질수록 나는 폴을 붙잡고 있는 시간이 더 많아졌다.


폴 타는 동안 나는 떨어지지 않기 위해, 부상을 입지 않기 위해

호흡과 근육 그리고 동작 하나, 하나에 집중하며 온전히 내 몸에만 집중해야만 했다.


그 누구의 간섭도, 공격도 침입할 수 없는 시간.

온전히 나, 그리고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의 고통만 존재하는 시간이었다.


나는 그냥 폴 타는 시간이 좋다.

멋있는 척, 관대한 척, 있는 척, 센 척하는 인간들 보다

특히 따뜻한 척 하는 인간들 보다

차가운 봉이 나는 더 따뜻한다.

더 좋다.

앞으로도 미치게 좋을 것 같다.


창밖은 여름, 폴 타기 딱 좋은 계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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