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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Apr 23. 2023

호칭 유감

내가 너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너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외국 사람들의 대화는 제일 먼저 상대방의 이름을 부르며 시작된다. 그래서 첫 만남은 이름을 교환하는 통성명의 과정이 필수적이다. 이렇게 알게 된 이름은 다음 만남에서 그들의 입에서 자연스럽고 정겹게 바로 튀어나온다. 마치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이름이 되어 있다. 만약 이 두 번째의 만남에서 상대의 이름이 기억나지 않거나 엉뚱한 이름을 말하게 되면 대단한 결례로 그들은 큰 죄라도 지은 듯 몸 둘 바를 모르고 미안해한다.       

우리는 어떤가. 우리 속담에 이름에 먹칠을 한다는 말이 있을 만큼 우리는 이름 그 자체에 그 사람의 명예와 인격이 있다고 여긴다. 특히 윗사람의 이름을 함부로 불렀다가는 천하의 후레자식이라는 욕을 들을 수도 있고 배우지 못한 막돼먹은 사람이 된다. 자신의 아버지의 함자를 남에게 말할 때도 무슨 자 무슨 자 해서 알려주어야 바른 예절이다.


관공서에 민원과 관련하여 공무원과 전화 통화를 할 때가 있다. 우리나라 관공서는 부서만 말할 뿐 직원이 자신의 이름을 밝히는 일은 거의 없다. 민원을 해결하고 다시 그 직원과 통화를 해야 할 필요가 있을 때를 위해 간혹 그 직원의 이름을 물어볼라치면 이쪽에서 이름을 먼저 물어보는 것이 결례를 범하는 것 같은 무례함이 들어 조심스럽기도 하고 저쪽은 또 저쪽대로 자신의 이름을 말하는 품이 선뜻 명쾌하지 않고 주저하는 분위기를 느낄 때가 있다. 우리 문화는 서로 이름을 밝힌다는 것이 사적인 영역인 경향이 있다.  

 




20여 년 전 일본에 머무를 때 나보다 두어 살 어린 한국인 친구와 언니동생하며 붙어 다녔는데 그녀가 일본인들 앞에서 나를 おねえさん(언니)하고 지칭하면 그들은 우리가 친자매 사이였냐고 놀란 토끼 눈으로 반문해서 짧은 일본어로 해명하느라 진땀을 뺐던 적이 있었다. 친하면 또는 친하고 싶거나 혹은 친해져야 하면(?) 바로 서로 언니 동생이 되고, 식당에서나 가게에서 처음 만난 주인과 손님은 갑자기 이모 삼촌이 되는 우리의 가족 호칭 문화를 그들은 신기하고 재미있어했다.      

또한 일본상점에 들어가면 어디서든 일본인들이 おきゃくさま(우리말로는 고객님 정도에 해당할까)라는 말을 깎듯이 사용하던 것이 인상적이었는데 그 시절 한국에서는 고객이라는 용어는 책에서만 쓰이는 문어체였고 일상적으로는 손님 정도의 단어가 통용되던 때였으니 그들의 서비스 정신이 세계적으로 유명할 때였다. 그 이후로 한국에서도 고객님이라는 호칭이 일상화되고 지금에 와서는 과용, 오용되어 호갱님이 되고, 고객님 사랑합니다에 이르러 공사의 구별을 초월하는 단계로까지 진화하였다.    

  

 



고객님만큼 새롭게 일상화된 호칭이 있다. 바로 선생님이다. 상대방의 이름을 모르는 상태에서 상대를 존중하는 의미로 상용화되어 통용되고 있다. 몇 해 전 행정복지센터에서 일을 처리하는데 담당공무원이 내게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당시 학교에 잠시 적을 두고  있던 나로서는 우스꽝스럽게도 이 사람이 내 직업을 어떻게 알았지? 하며 내심 놀랐는데 알고 보니 그곳의 모든 민원인이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이라는 말이 주는 원래의 의미 때문인지, 민원을 항의하며 얼굴이 붉어진 사람에게도 선생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선생님이 된 당사자는 당사자대로 왠지 선생님으로서 화를 내면 안 될 것 같기도 하고 부르는 쪽은 불린 사람에게 선생님으로서 체통을 지키라는 엄포를 놓는 것 같기도 하고 여러 가지 효과가 있는 셈이다. 어떤 직장에서는 동료들 간에 김 선생님 박 선생님 이런 식이어서 어떤 날은 미장원에서 머리를 맡기고 앉아 있다가 모두 서로를 선생님이라고 부르는 바람에 학교에 온 듯해서 좌불안석이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누군가를 가르치지 않게 되었을 때도 선생님이라고 불리는 것이 처음에는 어색하고 난감하였는데 이제는 나도 같이 선생님이라고 상대를 부르고 있다.           


음주운전 단속에 걸린 주취자도 선생님이 되고 범죄자에게 쇠고랑을 채우며 “선생님은...” 하며 미란다 원칙을 고지하는 영화 장면은 코미디처럼 웃음을 유발한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선생님이 되어갈 때의 부작용은 누군가를 가르치고 교육하는 교육자에게만 유효했던 선생님이라는 존칭이 본래 가지고 있던 고유한 의미를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원래의 선생님이라는 단어에 내포되어 있던 스승님이라는 존중의 의미가 사라져 버린다. 특별한 의미를 암묵적으로 지녔던 단어가 일반적인 단어가 됨으로써 표면적인 하나의 의미만으로 통용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런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는 말처럼 우리 문화에서 오랫동안 명예와 존경의 대상이었던 선생님이라는 호칭이 일반화된 것은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주는 존중에 걸맞은 다른 우리말이 특별히 없다는 데에 있다. 영어의 You나 일본어의 あなた에 해당하는 당신이라는 우리말은 타인에게 우호적으로 쓸 수 있는 구어체는 아니다. 또한 이름 뒤에 붙이는 ‘~씨’는 존칭으로 쓰이지만 친근함의 의미도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일반적으로 통용되기는 무리다. ‘~님’은 이름을 아는 상태에서 존중의 의미로 쓰이지만 구어체로는 잘 사용하지 않는다. 이름도 모르는 상태에서 존중의 의미로 타인을 지칭하는 적당한 우리말로 선생님이라는 단어가 적합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직장은 모름지기 가족같이 편한 동료들이 함께 일하며 마음을 공유하는 것이 훌륭한 일터라는 인식으로 공과사의 구별이 모호했던 전통적인 직장 내 가족문화를 가진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이 많아 이웃도 사촌이었으니 굳이 이름을 부르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여 ‘척하면 착’ 할 줄 아는 것을 미덕으로 여겼다. 그래서 이름을 부르고 이름이 불리는 것에 익숙하지 않다. 돌이켜보면 학교 다닐 때도 이름보다 몇 번이라는 번호로 불리는 것에 익숙했고 오히려 선생님께 이름이라도 불리는 날은 무슨 큰일이 났을 때였다. 이름은 꼭꼭 숨겨두는 보물단지같이 되어버렸다.      


처음 만나면 이름보다 나이가 먼저 궁금한 것이 우리 문화이고 낯선 사람의 이름을 선뜻 부르는 것이 예의가 아닌 것이 또한 우리의 문화이다. 이름을 부르지 못하기에 다른 호칭을 찾게 되고 그것이 선생님이 된 지금의 상황이 또 우리의 문화라면 문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그 유명한 김춘수 시인의 시처럼 그 사람이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고 나도 그에게 꽃이 되는 일은 아직은 우리의 문화에서 특별한 사적인 영역으로 남아있다. 이름이 꽃이 되기는 아직 이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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