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의 꽃들이 차례로 팝콘처럼 터졌다가 사라졌다. 벚나무는 채 영글지 못한 벚꽃송이에 비를 맞히기도 하면서 하얀 꽃을 안고 보름 남짓 서 있었다. 애꿎은 봄비에 어린 꽃잎이 떨어질까 노심초사했던 나와 달리 벚꽃송이는 비를 맞고 일주일을 더 버티다가 찬란한 꽃송이들을 미련 없이 바람과 함께 산산이 날려버렸다. 일 년에 한 번 365일 중에 열흘도 못 되는 시간 동안만 찬연히 자신을 드러낸 벚나무는 다시 다른 나무와 같은 모습으로 그저 초록잎이 전부인 나무가 되었다. 꽃이 피고 져서야 비로소 벚나무인 것을 사람들에게 알렸다.
벚꽃이 몇 달 동안 오래오래 피어있다면 사람들은 지금만큼 봄이 설레지 않았을 것이다. 금방 사라져서 아름다운 것인지 아름다워서 금방 사라지는 것인지 사라지는 줄 모르게 사라지는 것은 아름다움만을 남긴다. 그래서 언제부터인가 하얀 햇살 아래 눈부시게 하얀 벚꽃을 보면 곧 사라져야 할 꽃의 날들이 보이는 것이다. 사라질 것이 분명한데 또 너무나 분명하게 아름다워서 슬퍼지는 것이다. 젊은 날에는 탐스러운 꽃밖에 보이지 않았는데 시간이 나무처럼 딱딱해지면 떨어진 꽃들이 보인다. 소담스럽고 수줍은 여인같이 고왔던 목련꽃은 진물이 흐르는 으깨진 꽃잎 위에 사람의 발자국을 새긴 채 길 위에 누워있고, 만지면 녹을 듯 하얀 눈송이 같던 벚꽃은 먼지가 되어 길바닥을 굴렀다.
그토록 찬란하고 난연했던 꽃들이 이토록 처참하게 스러져가는 것을 보는 일은 우리도 다르지 않다고 말해주는 것 같이 두려운 일이다.
봄꽃들은 릴레이를 하듯 서로에게 바통을 넘겨준다. 봄이 오는 것을 샘내는 꽃샘추위 속에서도 봄을 알리려는 사명으로 사그라들지 않는 끝겨울의 찬바람에 떨면서 서 있던 노란 산수유는 한나절의 봄햇살에 아쉬운 듯 슬며시 그나마 자신과 같은 색의 개나리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마음이 놓였다. 개나리는 봄의 축제를 위해 담벼락에 기댄 채 벚꽃을 따랐다. 봄의 신호탄처럼 팡파르가 울리듯 벚꽃잔치가 벌어지고 불꽃놀이가 끝나듯 잔치는 금세 끝났다. 봄의 따사로운 햇살아래서 사람들은 하얀 햇빛으로 시간을 잊는다. 그리고 피리 부는 사나이의 피리소리에 이끌려 어딘가로 사라진 아이들처럼 우리 모두는 그 햇살에 모든 것을 잊은 채 흘러가는 것이다.
벚꽃이 눈이 되어 봄바람에 흩날리면 모든 꽃들은 피기를 멈추고 잠시 슬픔에 젖어 훨훨 날아간 벚꽃을 그리며 숙연해진다. 그리고 다시 봄의 따사로움은 진달래에게 전해져 온 천지는 붉은 물이 든다. 마치 그 화려했던 봄의 전부 같았던 벚꽃을 잊어야 한다는 듯 진달래와 철쭉은 붉어지기만 한다. 점점 뜨거워지는 봄볕에 진달래와 철쭉이 진이 빠지고 살갗이 짓물러질 때 빨간 장미는 연두색의 어린잎들 틈에서 작은 꽃송이를 만들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사이에 목련이 있다.
다소곳한 여인같이 정숙하고 고고한 목련은 봄의 한가운데에서 그 절정에 서 있다. 목련 꽃그늘아래에서 베르테르의 편지를 읽는다는 4월의 노래처럼 사랑하는 이를 닮은 목련 아래에서는 아직 부치지 못한 나의 편지들을 다시 홀로 펼쳐야 할 것만 같다. 튤립과 같은 꽃다운 꽃들 뒤로 배꽃, 복사꽃 같은 과일나무 꽃이 피고 땅바닥에까지 꽃잔디와 민들레로 발끝까지 봄이다. 이름도 알리지 않는 수많은 봄의 꽃들은 아무 데서나 흐드러지게 지천으로 피어 온 천지를 미친 듯이 꽃으로 다 메우고 나서야 꽃잎을 다 떨구고 초록잎의 풀과 나무가 된다. 형형색색 자신만의 색을 드러내던 갖은 꽃들이 지고 나면 모두 다 똑같은 초록이 된다. 봄꽃 중에서 가장 향이 강한 라일락은 그 향기로 봄을 기억하게 했다. 그래서 끝이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고 말하는 봄은 슬프게 잊혀간 봄꽃들 뒤의 라일락으로 끝나가는 봄을 달콤하게 기억하게 했다.
4월의 끝에서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을 눈앞에 두고 나는 다시 한번 찬란히 피어날 남은 봄꽃들을 두려운 마음으로 기다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