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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아 Jun 15. 2023

고리


한 때 세탁의 매력에 빠진 적이 있다. 청소나 빨래 같은 일은 결과의 지속성이 짧고 결과 대비 효율성이 떨어져 시간과 노력을 많이 들이는 것이 비생산적이라고 여겼고 다람쥐 쳇바퀴 돌리기 같이 무의미하게 반복적으로 느껴져서 일상의 순위에서 언제나 뒤로 밀려나기 일쑤였다. 그러나 살다 보면 가장 하찮게 생각해 왔던 것이 완전 다른 것으로 느껴질 때가 있지 않던가. 그때의 나도 그러했다.       

    

나의 하루는 세 번 이상 세탁기를 돌리는 것으로 시작했다. 아마 세탁기가 없었다면 세탁기를 대신한 나의 몸이 이미 빨랫감들처럼 해어졌을 것이다. 옷의 종류별로 또는 세탁방법에 따라 탈수 시간과 세탁시간이 달라졌다. 타월은 탈수를 오래하지 않아야 하며, 속옷은 세제가 남지 않을 때까지 충분한 헹굼을 위해 헹굼 추가가 필요했다. 옷감의 소재별로 합성섬유인지, 면인지, 울인지에 따라 세탁기에 선택 코스들이 다 별도로 있다는 것은 그것이 올바른 세탁의 정석임이 표준화되어 있다는 뜻이리라. 세탁뿐만 아니라 모든 일은 제대로 하느냐 대충 하느냐의 차이로 같은 일이 전혀 다른 일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의 방식이 그다지 세탁에 대해서 유별나다거나 까탈스럽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단지 세탁에 대한 당연한 일을 제대로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도 한 달 수도세가 목욕탕 물세만큼 나온다는 아는 부인의 사정에 비하면 나는 양반이라고 자신을 위안하였다.   

       

 일주에 한 번씩은 세탁통 청소코스도 잊지 않는다. 손빨래라면 대야를 매번 씻을 수 있지만 세탁조는 그럴 수 없는 것이라 마음 같아서는 코스 한 번을 완료할 때마다 세탁조를 청소해야 하나 그 정도가 되면 몸을 넘어 정신의 문제가 될 것 같아 그만두었다. 다양한 빨랫거리들이  순서와 차례는 다르지만 어쨌든 한 통의 세탁조 안에 모두 들어갔다가 나와야 한다는 것은  빨랫감을 더 더럽히는 일이므로 깨끗한 세탁조는 세탁물에 대한 예의였다.      


나의 세탁기의 표준코스 완료시간은 최소한 한 시간 반이므로 하루에 두세 번 세탁기를 돌리는 것만도 족히 오전시간은 지나간다. 시간을 줄이기 위한 급속코스도 있지만 그것은 왠지 빨래를 한 것 같지 않은 께름직함이 세탁물에 남으므로 피한다. 아침 7시쯤에 작동을 시작한 세탁기가 두 번의 풀코스와 청소용 하프코스를 돌고 11시 즈음에 모든 일을 끝내면 지금까지 세탁기가 한 일은 세탁의 전체 과정의 30퍼센트 정도였고 이제부터 나머지 더 중요한 일은 해의 몫이다. 아무리 세탁이 완벽히 되었다 해도 실내에서 건조하거나 건조기의 열풍이나 인공적인 뜨거움은 옷감을 괴롭히는 일 같았다.  빨래하기 딱 좋은 날, 막 세탁기에서 꺼낸 젖은 세탁물들을 모아 빨랫줄에 널고  뜨거운 해 아래에서 일광욕을 하듯 빠닥빠닥 말라가며 하늘하늘 날아오를 듯 변하는 빨랫감들을 쳐다보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미션을 완수한 듯 성취감 이상의 완성감은 완벽함을 불러왔다. 마치 운동에 한번 발을 들이면 점점 강도를 더한 운동을 해야 만족감을 느껴 일종의 운동중독을 보이듯 나 역시 이 순간에 중독된 듯했다.  


빨랫감은 해가 완전히 지기 전에 뜨끈뜨끈한 호빵의 온기가 남아있을 때 걷어야 한다. 해가 지기 시작하면 이미 늦다. 하루 동안 달려온 나와 세탁기와 해의 릴레이가 허사가 될 수 있다. 해가 기울어지기 시작하면 급격히 기온이 떨어지고 빨랫감에는 기우는 해의 습기가 묻어 버리는 것이다. 오후 한나절 뜨거운 햇살을 맞고 붉은 저녁노을을 보며 아직 식지 않은 빨랫감들을 걷을 때 마치 금방 구운 빵 냄새가 나는 것처럼 맛있어 보여 먹고 싶다는 충동이 드는 순간이 그날 하루 나의 수고로움에 대한 빨래의 선물이다.        

   

씻기는 것에 재미 아닌 재미를 들이면 그다음은 세탁실을 넘어 부엌에 까지 이른다. 개수대에는 수세미만 종류별로 있었다. 일차로 세제를  바르는 용, 헹구는 용, 기름기가 많은 종류 세척용, 탄 냄비를 긁어내는 용, 개수대 씻는 용. 무엇이든 과하면 병이 되는 법이니 나도 스스로 세운 원칙들에 이렇게 까지 해야 하나 싶다가도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한 번 그것에 빠져들면 아무리 사소한 것일지라도 엄청난 의미와 명분과 타당성이 부여되는 당연한 일이 될 수 있다. 모든 일은 정도의 문제일 뿐.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일이 그때의 나에게는 대단히 중요했던 삶의 사명 같은 일이었다.          






삶의 행진에서 남들과 보조를 맞추고 자신의 삶의 끈을 잡고 있는 사람이라면 세상과 연결할 고리가 필요하다. 그 고리는 세상과 자신을 연결하고 세상에서 자신이 소외되지 않고 세상을 잘 따라가고 있다는 위안이 되었다. 스스로에게 만족을 주는 무언가를 세상의 어느 한 귀퉁이에 고리를 걸어 삶을 붙들어맨다.  누군가는 삶을 산다는 자체를 잊을 만큼 그 고리가 튼튼하고 대단하고, 누군가는 살기 위해 고리를 만드는 일에 삶을 바친다.       


삶과 나를 이어주는 고리. 한때는 내가 가장 하찮다고 여겼던 것들을 고리로 만들면서 나는 삶을 본다. 이 고리가 아니면 이제 세상은 나를 놓아버리고 말 것 같다. 빠른 물살에 휩쓸려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사라져 버릴 것 같은 자신을 붙들어 맬 나를 살게 하는 마지막 고리, 그것이 그때의 나에게는 빨래였다. 세탁조 안에서 물과 함께 돌아가는 빨랫감들을 보면서 강력한 물살을 맞으면서도 더 깨끗해지고 있는 빨랫감들처럼 나 자신도 세상의 풍파 속에서도 꿋꿋이 견디어 내는 중이라고, 이 시간만 지나면 깨끗하게 모든 것이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의 고리로 평생을 살지는 못한다. 아주 튼튼하고 확실한 고리를 보통의 사람들은 갖지 못해서 사람들은 계속 그 고리를 손보거나, 아예 새로운 것으로 갈아 끼거나, 가지고 있는 고리를 고치면서 고리에 신경을 쓴다.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해 세상에 거는 고리. 지금 나의 고리는 무엇으로 바뀌었을까. 그리고 언젠가는 그 고리가 필요 없어질 날이 올 것이다. 그런 날이 오면  삶의 진정한 자유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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