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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Jul 07. 2020

입사지원서를 읽다가 그날이 떠올랐다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01

“제 책장을 둘러보니 귀사에서 나온 책이 모두 꽂혀 있었습니다.
이에 귀사에 편집자로 지원하고 싶습니다…….”     


편집자 인생 13년 만에 팀원을 뽑는 중이다. 어떤 분이 올지, 앞으로 더 재밌게, 신나게 일을 도모할 생각에 채용 공고를 올리는 날부터 설렘 반 두려움 반을 느끼고 있다. 나를 받아준 선배들도 이런 마음이었을까. 모니터 화면 속 지원서 문장 위로 첫 직장의 편집장님부터 그간 거쳐왔던 상사들, 선배들, 동료들이 눈앞을 빠르게 스쳐간다.



'책장에 우리 회사 책이 모두 꽂혀 있다니. 이런 귀여운 거짓말을 보았나.' (엄마 미소)



서울출판예비학교(SBI) 교육과정을 졸업할 무렵, 어느 출판사를 지원해야 할지 막막했던 우리에게 출판학교 선생님이 했던 말이다. 책장을 살펴보라고, 자신의 취향이 보일 거라고. 그럼 그 회사에 지원하면 된다고. 중고등학교 시절부터 썼던 고향 집 나의 책장에는 엄마 취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잔잔한 스님 에세이와 잠언집, 당시 많이 팔리던 소설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주로 해외문학과 스님 에세이를 내는 출판사에서 사회생활 첫발을 내딛게 되었다.



어느새 10살 아래의 후배들의 지원서를 읽는다. ‘졸업 예정’이라는 말 뒤에 아직 사회를 겪어보지 못한 누군가의 초조함과 간절함, 설렘을 동시에 읽는다. 책을 만드는 과정에 대해 알 길이 없으니 그간 읽어왔던 책을 토대로 하고 싶은 일들을 상상해보는 시간. 책 뒤에 숨은 노동의 과정을 알기 전까지, 매일 출퇴근을 하며 주말을 기다리는 직장인이 되기 전까지 독자로서, 학생으로서 미지의 세계를 향해 동경과 환상을 품던 그 시간들이 어렴풋이 떠오른다.



수학이 너무 싫어서 문과를 택했고, 불어불문학 전공을 했다. 3학년쯤 되니 친구들은 공무원 수험서를 들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언제 붙을지 모를 끝없는 줄 끝에 서고 싶지는 않았다. 취업 스터디에 들어갔다. ‘전공 불문’이라는 말에 용기를 갖고 지원서를 냈지만 연락은 오지 않았다. 이공계 전공인 스터디 멤버들이 면접 경험을 쌓는 동안, 나는 24년 인생 자체에 대한 패배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취업 스터디를 하기 위해 이른 아침부터 학교 휴게실에 앉아 신문을 뒤적이던 중이었다. 눈에 띈 광고가 있었다.



“책이 밥 먹여 주냐고요? 네, 밥 먹여 줍니다.”



지금 생각하면 참 아찔한 카피가 아닐 수 없는데, 내게는 책과 밥이 정말 대문짝만하게 보였다. SBI 2기를 뽑는다는 광고였다. 그 광고 하나로 SBI에 지원해 처음으로 면접을 보았고, 우여곡절 끝에 합격 통보를 받았다.



서울 합정에 있다는 SBI를 다니기 위해 고양시 화정에 사는 작은이모 집에 잠시 얹혀 살기로 했는데 복병은 아빠였다.


“안 가면 안 되냐? 여기서 공무원 하다가 시집가면 얼마나 좋아?”


나는 기가 막혀서 목이 메었다.


“아빠, 나는 공무원 진짜 싫어요.”


사실 지금도 공무원의 업무 내용은 잘 모른다. 그저 안정적이라는 말로 한창의 나이를 저당 잡히고 싶지 않아 도망쳤을 뿐.



편집자라는 직업을 알게 되고 내가 꿈꾸던 일이라고 생각했다. 단순 반복 업무보다 창의적인 일을 하고 싶었고, 매번 새로운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나의 흥미를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박봉이라고 하지만 나의 일을 사랑하면서 얻는 만족감이 클 것 같았다(월급이 안 나올 줄은 몰랐지). 대부분 작은 규모의 회사라고 하지만 그래서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귀여움을 받는 신입사원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가족’의 함정을 그땐 몰랐지).



희망연봉에 최저임금도 안 될 금액을 적어놓은 지원자의 이력서를 본다. 당장이라도 만나서 사회생활 그렇게 만만한 거 아니야, 정신 바짝 차려야 된다고 흔들어주고 싶다. 경력이 꽤 많은 누군가는 자신의 경력 반 정도에 해당할 금액을 희망 연봉으로 적어두었다. 업계의 현실일까, 어떻게든 취업이 먼저라는 생존을 위한 방편일까.



한편으로는 아무 정보가 없는 신입 지원인데도 남자 지원자와 여자 지원자의 연봉 차이에 아찔하다. 주변에서 보고 듣는 연봉의 차이일까, 사회에서 심어준 인식 차이일까……. 언제쯤 이 차이를 동등하게 끌어올릴 수 있을까.



나도 모르게 사무실에 있는 주변 사람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저마다 책상 앞에서 집중하고 있는 표정들.



나는 그만 생각이 많아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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