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에디터리 Sep 08. 2020

폭풍 마감이 지나고 난 뒤(feat.편집자의 회고)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13

드. 디. 어. 책을 마감했다.

2월에 이직을 하고 이 회사에서 처음 낸 책이자, 이전 직장에서부터 편집자 하나만 믿고 함께 작업해준 고마운 작가님들의 책.

초기 비용이 많이 드는 대형 프로젝트였고, 판매도 대형 사이즈가 될 책.

그리고 무엇보다 나에게 '요리 실용서'라는 새로운 세계를 처음 경험하게 한 책.

(이전에 칵테일 책을 만든 적이 있었는데요... 그건 정말 아주 간단한 하루 촬영이면 끝나는 세계였고요...)


편집자가 책 만드는 과정을 상상하자면

하나의 판을 벌였다가, 완벽하게 세계를 구현해낸 뒤, 그 판을 닫는 장면이 떠오른다.

이 책의 시작이 그랬다.


43년간 요리를 해온 할머니의 노하우가 담긴 요리책을 만들자.

자,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지?

.

.

.

망망대해에 떠 있는 쪽배 위에 있는 기분이었다. (거기 누구 없어요~~~?)


그러나 나에게는 믿을 구석이 있다. 지금껏 이 업계에서 14년간 구른 덕에 내 옆에 있는 수많은 숨은 고수들.

이번에는 실용책의 대모, 늘 따스한 미소로 누구나를 품어주는 JO 언니, 전 직장 동료를 점심시간에 찾아가 상담을 했다. (저 뭐부터 해야 해요? ㅠㅠ)

또 부족한 팁을 얻고자 유명 셰프 책을 진행해본 동네 언니를 찾고 작업 히스토리 파일도 얻어 푸드스타일리스트, 사진작가와 어떻게 협업해야 하는지 대략 그림을 그려보기도 했다.

(나의 소중한 사람들, 각자의 자리에서 다양한 작업을 진행해본 것이 서로의 레퍼런스가 되어준다. 든든하다)


그렇게 진행된 큰 흐름을 적자면


1. 레시피를 몇 가지 실을지 가짓수를 정한다. (한식이었으니 손이 배가 가고, 재료 가짓수도 많았다. 1시간에 요리 하나 찍을 수 있다)

2. 푸드스타일리스트를 섭외한다. (스튜디오를 대부분 운영하고 있으니 장소가 해결된다)

3. 푸드스타일리스트와 작업을 함께하는 사진 작가를 소개받는다. (협업을 오래 해본 호흡이 중요할 거라 짐작했다)

4. 작업의 범위를 정하고 계약서를 작성한다. (촬영 일수, 촬영 컨셉 , 촬영 순서 등 정할 것들이 많다)

5. 현장을 지휘하며 촬영한다. (현장 인원은 대략 10명쯤 된다. 현장에서 바로 사진을 셀렉한다)

6. 그 다음부터는 다른 책을 만드는 과정과 같다. 다만 본문 디자인 요소가 많고, 실제 요리하듯이 행동을 설명하는 문장, 재료 순서를 나열하는 규칙 등

요리책에 부여되는 새로운 문법을 배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요리책 전문 외주교정자의 손을 빌렸고 원고는 제자리를 빠르게 찾아갔다)

촬영 현장의 리스트. 예상 종료시각 밤 10시를 어떻게든 줄이고자 했던 치열한 전투의 현장.

이런 과정을 지난 4월부터 8월 말까지, 달려왔다.

(물론 이 프로젝트 하나에만 매달리는 시간은 아니었다. 동시 진행되는 책들과 틈틈이 기획하고, 이렇게 브런치도 쓰고)

그리고 예약판매 오픈하기 전까지, 마케팅팀과 굿즈 상품을 선택하고 컨펌하고...

책이 제작되는 동안 사은품도 제작되어야 하니 마감이 동시에 맞물릴 수밖에 없다.

태풍이 오든, 코로나가 심각해지든 나는 회사의 붙박이가구처럼 앉아 원고를 보고 또 봤다.


인쇄를 하기 하루 전, 예약판매 오픈이 시작되었고 뜻밖의 굿즈가 터지는 바람에 종일 주문과정에 대해 문의를 쏟아내는 독자들을 응대했다.

(도서정가제를 하는 건 맞는데, 연말정산에 문화비로 소득공제가 시행되면서 사은품 결제는 따로 하게 만든 이 번거로운 시스템ㅠ)


인쇄 현장. 저 종이 묶음 단위가 전지 500장, 1연이라고 한다. 산처럼 쌓여 있던 본문 종이의 일부. 종이에게 미안하지 않은 책이 되렴.


드디어 인쇄 감리를 보는 날, 이전 책보다 더 오른 주문수를 보면서 덜덜 떨리기 시작했고, 언제나 무던한 모습으로 진정시켜주는 디자이너님을 믿으며 함께 인쇄 감리를 마쳤다.

(양면인쇄기는 또 처음이었는데... 이런 신문물을 14년만에 만나게 되다니요? 속도가 빠를 수밖에!)


주말이 지나 인쇄물을 페이지대로 접어 제본하지 않은 상태로 온 종이뭉치(가제본이라고 한다)를 확인했다. 감리를 본 대로 사진 색감이 잘 나왔는지, 글자의 인쇄 핀은 잘 맞았는지...

빳빳한 새 종이 위 잉크 냄새를 맡으면서도 세상에 없던 책이 진짜 나온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는다.

보통 책이라면 1년에 팔기 힘든 부수를 초판으로 찍으면서 산처럼 쌓인 종이를 보고 왔는데.

어서 빨리감기를 하고 싶다. 독자들이 올리는 인증샷을 봐야만 비로소 안심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일주일이 남았다...


이 모든 날들이 지나 비로소 손에 쥐어지는 한 권의 책이 된다.

과정 속에 지치기도 하고, 누군가를 설득해야 하고, 다시 계획을 수정해야 하고... 매번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는 반복되는 일.

매번 새롭게 배우는 게 많아서 여전히 재미가 있는 것 같기도 하다.(고 나를 속여 본다)

떨쳐내자고 애를 써도 아직까지도 심장 어디 귀퉁이에 붙어 떨어지지 않는 불안과 부담에 몇 날을 잠을 뒤척여도

결과물을 보고 환호해주는 사람들이 있어서,

짜릿한 희열과 보람을 느낄 수 있어서 기쁘다.

고맙습니다, 독자님.


자, 그럼 이제 다음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원고를 만나러 갈 시간! (괜히 희망차게 외쳐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