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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Jan 19. 2021

어떤 책을 국내 독자에게 소개할까 - 외서 기획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하세요 25


편집자의 메일함 중에는 국내 에이전시에서 오는 레터들이 있다. 영미권, 독일, 프랑스, 스페인 등 유럽권, 일본어권, 중국어권으로 나뉘고 성인용과 어린이용이 나뉘어 온다. 업무 시간 중 틈틈이 정기적으로 오는 에이전시의 레터들을 살펴본다. 레터를 보내주는 에이전시는 해외 저작권사를 담당하며 국내 출판사들에게 출판권을 중개하고 계약 체결 시 일정 수수료를 받는 곳이다. 첫 직장에서 편집장님과 함께 미팅 순회를 다녔던 곳.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출판사와는 또 다르게 ‘에이전시’라는 공간이 무척 매력적으로 다가올 것이다. 해외에서 비행기를 타고 도착한 다양한 언어의 책들이 가득 쌓여 있던 미팅룸의 풍경은 동경해오던 외국 도서관에 입장한 기분이었다.


에이전시에서 일하는 에이전트들은 해외 저작권사로부터 레터를 받아 국내 출판사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책의 소개 자료를 간단히 번역을 해서 전달한다. 지구 반대편 누군가의 시간을 녹여 쓴 책들 가운데 의미든 재미든 화제성이든 국경을 넘고 언어권을 벗어나 소개될 기회는 이렇게 에이전시를 통해서 생기기도 하고, 혹은 편집자가 아마존이나 뉴스 등 정보를 접하다가 발견한 책을 에이전시에 판권(출판할 권리) 문의로 역으로 문을 두드리기도 한다. 이런 과정은 외서 기획에서 숨 쉴 듯 자연스러운 일이며, 해당 외국 출판사까지 연락이 닿아 검토용 원고를 받으면 이미 그 순간부터 마음이 벅차오르기도 한다.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이 저마다의 자리에서 일을 하고 있음으로 이렇게 연결된다는 것이 놀랍지 않은가.


몇 달 전 아주 오랜만에 에이전시 미팅을 갔다. 정통이나 본격 미스터리보다는 도메스틱 스릴러(domestic thriller, 가정에서 일어나는 일을 소재로 쓴다고 하여 가정 스릴러로도 번역된다. 여성 작가들이 주로 쓰고 여성 독자들이 읽는 장르이기도 하다) 쪽을 소개받기 위해서였다.


넷플릭스, 왓챠로 봇물이 터진 콘텐츠 시장에 맞춰 영상 매체로 판권이 팔린 작품, 흡입력 있는 이야기만으로 승부를 보는 작품을 찾고 싶었다. 「킬링 이브」, 「커져버린 사소한 거짓말」과 같은, 주로 여성이 복수하는 짜릿한 카타르시스가 있으면서 오로지 재미만을 추구하는 소설 추천을 사전에 부탁해두었다.


저작권팀 과장님과 함께 동행한 미팅에서 에이전트 분들은 자신이 맡은 책들을 한 권씩 소개했다. 한 책당 저자 소개와 함께 줄줄 읊어주는 줄거리를 듣고 있자니 여긴 마치 이야기 주머니가 가득한 도깨비들의 세계가 아닌가 싶었다. 귀 기울여 듣다 보면 소개 자료뿐 아니라 책 한 권을 직접 읽고 진짜 재밌어서 설명해주는 경우에는 나에게까지 그 재미가 생생하게 전달된다. 책을 읽고 그 내용을 재밌게 이야기해주는 재능이 있다면, 도서 에이전시 쪽으로 직업을 고려해보는 것도 좋지 않을까? 물론 외국어에 능통해야 하고 저작권을 다루는 부분에도 상당한 지식이 필요하겠지만 말이다.


미팅 후 회사로 돌아와 검토를 희망한 도서들의 검토용 원고 pdf를 메일로 받는다. 이중에서 번역가에게 상세 검토를 맡길 만한 책이 있을지 한 번 더 고민해본다. 아마존에 들어가 수십 만 부 판매되었다는 책의 리뷰를 살펴본다(장단점을 정확하게 써둔 독자들의 속 시원한 리뷰들을 보고 있자니, 칭찬 일색인 국내 온라인 서점의 리뷰들은 어쩐지 씁쓸한 기분이 든다). 이전에 국내에 출간된 다른 책과의 유사점, 차별점도 살피고 독자가 예상되는지, 국내 독자에게 심리적 거부감은 없는 소재일지(주인공이 비호감형이거나 단지 미쳐서 벌인 일이라면 국내 독자에게는 매력적으로 다가가지 못한다. 아동 학대 등 폭력적인 장면들이 자주 등장하고 매우 상세히 묘사된 소설은 피한다. 영상보다 글이 더 실감나기 때문에 읽기가 힘들어진다. 시대적 배경이 달라 설명이 많아지는 소설도 피한다. 결말이 비극적인 것도 지양한다) 최대한 샅샅이 찾아본다.


검토를 할 만하다는 편집부의 판단이 서면, 그 작품과 잘 어울릴 번역가님을 섭외한다. 누가 검토하느냐에 따라서도 재미를 느끼는 부분도 다르고, 매력적이라 여기는 방향도 다를 수밖에 없다(이렇게 과정마다 하늘에 맡기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도 참 신기하다). 주로 그 분야를 오래 작업했거나 최근 비슷한 작품을 작업한 번역가님을 찾는데, 비교할 만한 작품을 이미 알고 있다는 전제하에 새 타이틀의 장단점을 파악하기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상세 검토서를 의뢰하는 기간은 2주, 책 한 권을 대략 일주일간 읽고, 내용 요약 및 유사도서, 국내 소개될 시의 SWOT 분석, 검토자의 주관적 의견, 샘플 번역원고(문체를 살필 겸 결정적 장면의 분위기를 볼 겸)를 작성한다. 검토 작업을 마치고 계약이 성사되면 상세 검토를 한 번역가님과 번역 계약을 하는 게 이 분야의 룰이다. 검토는 하나의 프로젝트를 맡는 첫 단계라서 번역가님들은 대체로 성실하게 검토서를 작성해주시고 편집자는 그 검토서로 판단의 기준을 잡는다. 단, 번역 의뢰가 밀려 있는 베테랑 번역가님들은 검토서 작업을 하지 않으니 주의하자.


검토서 작업은 대개 번역 10년차 이하, 막 활발히 활동하고 계신 분들이 주로 한다. 번역을 막 시작한 분들은 흥미롭게 본 원서의 검토서를 작성해서 출판사에 투고 형식으로 소개하기도 한다. 이때 주의해야 할 점은 판권이 살아 있는지 확인이 안 된 원서를 소개할 수 있다는 점. 투고된 검토서가 마음에 들었다면 에이전시에 판권 문의부터 두드리고 시작하자.


출판사는 번역가들의 일을 중개하는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검토를 의뢰하고 번역 계약을 하기도 한다. 마감 기한 관리 및 번역 품질에 대한 피드백을 관리해주는 덕분에 한결 수월하게 작업하도록 도와주시는 분들이다. 더불어 출판사의 번역료 지급 문제도 관리를 해주니 소속 번역가분들에게도 한결 도움이 될 듯하다. 번역 5년차까지는 번역 에이전시를 통해 소개받는 분위기다. 편집자는 대체로 책을 읽고 번역이 잘된 것 같으면 그 번역가의 이름을 기억해두었다가 일을 의뢰하는 방식을 택한다. 또 동료 편집자들 알음알음으로 성실한 번역가님들을 소개받기도 한다.


지금껏 일해본 번역가님들은 대체로 마감을 칼같이 지키며 텍스트에 대한 책임감이 강한 분들이었다. 편집자가 놓칠 수 뻔한 책의 의미 혹은 재미를, 저자와 편집자 사이에서 길을 내며 찾아주신다. 업무 강도에 비해 작업료가 그리 높지 못한 작업(돈이 많이 흘러드는 출판업계가 되면 좋겠다)을 꾸준히 하고 계신 이 분들은 대부분 자신의 일을 사랑한다. 책 한 권을 두세 달 동안 마주하면서 단어 하나하나를 바꾸는 작업을 하면서 저자의 숨은 의도를 유추한다. 작가의 작품에서 번역가인 자신의 몸을 통과해 나오는 이야기들을 왜곡 없이 보다 정확하게 전달하고자 한다. 이렇게 회사 밖 동료를 하나 더 얻고 편집자는 한 권의 책을 함께 만들어간다(이 자리를 빌어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독자이자 동시에 편집자로서 전하고 싶습니다).


약 한 달 전쯤, 에이전시 뉴스레터로 일본의 ‘이 미스터리가 대단해’ 2020 수상작이 소개되었다. 일본 소설에 관심이 많은 독자라면 익숙할 이 이름의 상은 일본의 한 잡지사의 주최로 독자, 평론가, 대학의 미스터리 동아리 등 추리소설 팬들이 그 해 읽은 소설에서 베스트를 뽑은 투표를 반영하여 순위를 매겨 베스트 10을 뽑는 방식이다. 그해에 출간된 미스터리 신간만을 대상으로 하는 상이 아닌데, 이 투표와 동시에 신인에게만 주는 ‘대상’이 있다. 에이전시 뉴스레터로 소개된 것은 2020년 대상 수상작이었다.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대상     
흔히 ‘고노미스 대상’으로 부른다. 2002년 다카라지마샤를 비롯한 3개 출판사가 함께 만든 상이다. 비교적 최근에 만들어졌으며 상금이 1,200만 엔에 이른다. 다른 신인상과 달리 최종 심사위원은 평론가로 구성되어 있다. 제4회 수상작 가이도 다케루의 《바티스타 수술 팀의 영광》이 큰 성공을 거두며 상의 위상도 높아졌다. 수상작은 매년 발행하는 무크지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에 기성작가의 작품 순위와 함께 발표한다. 그런 까닭에 ‘이 미스터리가 대단하다!’ 1위와 신인상인 ‘대상’을 혼동하는 사람도 있다.
- 출처 : 권일영, 「일본 추리문학상에 대하여」
 http://ch.yes24.com/Article/View/22099     


이렇게 국내 독자에게도 잘 알려진 수상작 관련해서는 공개 오퍼로, 국내 에이전시 어디에서나 동시에 메일을 보낸다. 그리고 그중 한 에이전시 레터에서 오퍼마감일이 빨간 볼드체로 적혀 있는 것을 봤다. 아... 어디선가 오퍼가 들어온 모양이다. 작품을 소개한 에이전시 중 한 에이전시를 골라 검토용 원고를 요청했다. 그리고 몇 안 되는 내 머릿속 일본 소설 번역가 분들 중 한 분에게 검토 의뢰를 했다. 바로 회신이 왔다.


“아 그런데 어쩌죠. 정말 딱 한 시간 전에 타 출판사에서 해당 책의 검토 의뢰를 수락했지 뭐예요."


갑자기 숨이 가빠지고 손에 땀이 난다. 여기저기 내노라하는 번역가 분들에게 연락을 돌리고 있을 편집자들의 분주한 손가락이 떠오른다. 무엇보다 원고를 검토하고 내부 논의를 거치고 오퍼 금액을 정하는 등의 과정을 무엇보다 스피드 있게 진행해야 한다.


커피 한 모금을 마시며 또 누가 있었지 싶어 그간 재밌게 읽은 일본 미스터리 소설을 검색해본다. 한 번도 연락해본 적 없지만, 좋은 작품을 많이 번역하셨으니 받아주시기만 하면 좋겠다 싶은 번역가 분이 눈에 띈다. 블로그를 본 적 있는 것 같은데... 다시 검색. 찾았다!!!!! 한껏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메일을 열심히 썼다. 번역 작품을 보고 연락해온 편집자라고 하니 번역가님도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해주셨다. 빠듯한 일정의 검토 의뢰임에도 불구하고 가능하다는 고마운 말씀도.


그렇게 원고 검토 의뢰를 무사히 마쳤던 그날. 내 몸은 책상 앞에 앉아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내 마음은 총성 없는 전쟁터를 한바탕 휩쓴 기분이 들었다.


처음 연락해본 번역가님은 성심성의껏 검토를 해주셨는데 안타깝게도 소설에 대한 내부 논의는 통과되지 못했다. 우리 회사에서 꼭 출간해야 할 작품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편집부 내부에서 같이 논의해본 이야기들은 앞으로 우리 팀이 소설 기획을 할 때 염두에 둬야 할 지점이 무엇인지 경험치를 쌓을 수 있었다.


이렇게 외서 기획은 물리적 공간을 뛰어넘어 오로지 동시대성으로 진행이 된다. 어떤 인연으로 지구 반대편 작가와 인연을 맺을 때, 국내 독자들에게 이 발견을 소중하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크다. 특히 처음 소개되는 작가라면 출판사에서도 ‘런칭’하는 공력을 더 쏟기 마련이다. 한 권의 책이 되기까지 몇 번의 허들의 넘어야 했을지 모른다.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몇 겹의 인연이 닿아 한 권의 번역된 책이 오늘도 탄생하겠지. 한국어권이라는 이 작은 나라에 사는 한 명의 독자로서 내게 주어진 몫은 그저 오늘도 감사히 읽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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