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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Jan 05. 2021

편집자는 누구 편이세요?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23

나는 내가 편집한 책의 저자들과 친우, 전우, 악우의 관계를 맺고 있다. 하지만 착각해서는 안 된다. 어디까지나 봐야 할 것은 저자가 아니라 독자다. 과정이 아니라 결과다.
- 227면, 미노와 고스케, 『미치지 않고서야』 중에서


이 책의 띠지에는 “1년에 100만 부를 팔아치우는 천재 편집자”라는 별표가 자랑스레 붙어 있다. 대체 뭐가 다르길래 이 사람은 책을 만들어 100만 부나 팔 수 있었던 걸까? 이 책을 강력 추천해준 김얀 작가님 덕분에 아침 출근길에 들고 나섰다. 지하철 안에서 읽기 시작하자마자 100퍼센트, 아니 1000퍼센트 공감하는 문장들을 페이지마다 만났다.

“독자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한 권의 책을 통해 가장 많이 성장하는 사람은 단언컨대 편집자다.(17면)”는 문장에서는, 새벽 5시에 일어나는 저자의 책을 만들고 난 뒤로 저자처럼 그 시간을 지키고 일어나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하던 편집자(였던) 친구가 생각났다. 문학만 읽는 대학 동기로부터 경제경영/자기계발서는 안 읽는다, 종이가 아깝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친구는 발끈했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책을 만들고 있고, 자신이 만드는 책에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책을 한 권 만들 때마다 자신의 삶을 하나씩 바꾸려고 노력한다고 했다. 한순간 스친 말이었지만 지금껏 기억하고 있는 장면이다.

“자신의 이름을 남기는 것까지가 일이다(142면)”라는 말도 좋았다. 책 표지에는 당연히 저자 이름만 새겨진다. 그리고 그 책은 출간됨과 동시에 작가의 책이 된다. 이전까지 협업했던 수많은 사람들은 엔딩 크레딧처럼 책의 맨 뒷페이지 판권에 소개되기도 하는데, 종종 판권면에 대표 이름밖에 없는 책도 있다(그럴 때는 내가 다 서운하다. 출판사 문을 두드리며 외치고 싶다. 이 책을 만든 편집자를 소개해주세요).


처음 출판사에 입사했던 15년 전에는 편집자 선배들이 “판권에 이름 넣는 거 부담스럽다”라거나 “책임편집이라고 이름 적어놓는 게 좋아 보여? 그 ‘책임’이란 말에 오타부터 시작해 제작 사고까지 다양하게 편집자에게 넘어온다고”라는 불평을 듣기도 했다. 저자가 ‘작가의 말’에 “이 책을 만들어주신 000 편집자님 감사하다”고 적어오면 난처해하며 이름을 빼는 선배들, 동료들이 아직도 많다. 저마다의 입장이 있겠지만 나는 늘 이 호명이 반갑고 감사하고 뿌듯하다. 네, 제가 함께했죠. 이 책을 저 아니어도 만들 수 있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래도 제가 만들어서 이렇게 좋은 책이 되었답니다. 내 이름을 걸고 자신 있게 소개하고 싶은 마음이 더 크다.



편집자는 왜 ‘그림자 노동’이라고 불리는 걸까. 책이라는 특성상, 저자와 독자의 일대일 소통이어야지, 그 사이에 편집자가 보이면 안 된다는 선배들의 말. 물론 책이라는 ‘텍스트’ 안에서는 그렇다. 다만 보이지 않는 길 위에서 저자를 독려하면서 램프를 들고 앞장서 한 걸음씩 함께 걸었던 편집자의 존재를 굳이 숨길 이유는 없지 않을까(아 물론 판권에서 여러 가지 말 못할 이유로 이름을 빼고 싶은 책이 있다는 건… 슬프게도 인정한다). 책의 페이지에 실린 내 이름을 볼 때마다 보람을 느끼는 나는, 이직하면 책임편집자 이름을 빼버리는 못된 관행(더 이상 이 회사 직원이 아니라는 이유로)에도 반대한다. 결국 남는 건 이름인데 말이다.


편집자의 이름이 판권에 명시될 때 분명히 어깨에 지워지는 무게감이 있다. 내 이름을 걸고 나가는 책이 독자로부터 비난을 받거나,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거나, 저자에게 조금이라도 거리끼는 마음이 들지 않는 책이 되지 않도록 하겠다는 것. 무엇보다 이 책을 내용으로 보나 실체(겉으로 보이는 책의 꼴)로 보나 부끄럽지 않은 수준의 책으로 만들었다는 나만의 자부심을 지켜야 하고, 그런 뒤에야 책을 홍보할 때 거리낄 것 없이 내 온 맘을 다해 매달릴 수 있다. 어디에서든 “000 책을 만든 편집자”라는 소개를 받을 때마다 쑥스러움을 저 멀리 던져버리고 흐뭇한 미소로 “네, 맞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여유로이 답변하고자 노력한다. 우리는 우리의 자랑을 더 멀리 닿을 때까지 이야기할 필요가 있다.

편집자가 이름을 함께 걸 때, 저자도 편집자의 역할을 인정하고 존중하게 된다고 믿는다. 처음 편집자 일을 시작했을 때, 저자와의 관계가 어려웠던 데에는 ‘000 선생님’이라고 존칭을 붙이는 게 한몫했다. 나는 일개 사원인데 함께 일해야 하는, 때로는 회사의 입장을 전달해야 하는 상대가 무려 ‘선생님’이라는 존재라는 게 버겁고 어려웠다. 그래서 혼자 원칙을 정했다. 나는 더 이상 ‘선생님’이라는 호칭을 쓰지 않겠다. 내가 하는 일로써 ‘편집자’가 되었듯이 상대도 하는 일로써 ‘작가님’일 뿐이다. 이렇게 마음먹고 나자 모든 것이 한결 쉬워졌다.

책 출간이라는 공동 목표를 세우고 ‘작가님’은 작가의 입장에서 자신의 역할을 수행한다. 나는 작가와 협업하는 ‘편집자’로서 내 역할을 수행한다. 편집자의 목표는 좋은 책을 더 많은 독자들을 만나도록 만드는 것이지, ‘선생님’의 기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내 업무가 아닌 부분에서는 분명히 선을 그을 수 있다. 호칭 하나로 나의 위치가 조금은 높아진 느낌이었고 그 태도는 책을 만드는 데 의견을 조율하는 부분에도 분명히 좌우했다. 함께 타고 있는 이 배의 방향키를 편집자인 내가 쥐고 있는 것을 서로가 인지했다. 그러고 나니 편집자의 의견을 먼저 묻고 상의해주는 작가님들을 만났다. 편집자의 판단을 믿고 의지하는 작가님들에게 그 기대를 배반하지 않고자 나도 나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그런 일의 순환이 좋다.



편집자는 책을 만들면서 크게 세 주체를 상대한다(작가만이 유일하다고 믿거나 혹은 그렇게 스스로도 속거나 혹은 바로 앞에 앉은 회사 상사의 눈치를 보면서  사실을 잊기 쉽다). 첫 번째는 나에게 월급을 주며 책을 만드는 데 실질적 지원을 하는 회사, 두 번째는 회사 밖에서 나와 함께 작업을 하고 있으면서 동시에 책의 처음이자 끝인 작가, 그리고 마지막으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내가 만드는 상품의 가치를 알아보고 구매할 독자. 이중 어느 쪽으로 편집자가 무게를 두고 작업하는지, 누구를 더 생각하는지에 따라 책의 방향은 매우 달라질 수밖에 없다. 물론 셋의 관계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도 맞다. 이익을 추구해야 하는 회사와 이익과 더불어 ‘자신’을 걸고 작품을 쓰는 작가, 그리고 다른 사정보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하는 책을 기대하는 독자. 정답은 없는 길 위에서, 편집자는 무게 추를 이리저리 움직이며 책을 만들어간다.

다만 셋의 관계를 깨뜨리지 않기 위해 편집자가 명심해야 할 부분이 있다. 회사 밖 작가의 의견은 ‘나’라는 편집자를 통과해야만 회사에 전달되기 때문에, 내가 어떤 뉘앙스로 전달하느냐에 따라 작가에 대한 회사의 입장은 달라질 수밖에 없다. 작가의 뜻을 감정적으로 받아들이거나 소통에 미숙해 괜한 오해를 만드는 편집자로 인해 책을 만드는 과정은 물론 책을 출간한 이후까지 회사 내에서 저자가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는 경우가 있기도 하다. 설령 작가의 감정이 정말 자신에게 영향을 미쳤고 그 일을 보고해야 하는 경우라면, 방금 받은 그 감정을 잠시 식히는 타임을 가진 뒤에, 책을 만드는 입장에서 무엇이 최선일지 나름의 판단을 한 후에, 회사에 보고해도 늦지 않다.

경력이 없을 적에는 이유 없는 화살이 나를 향해 꽂힐 때 그대로 타격을 입었다. 시간이 지나고 이런 일들의 유형이 어느 정도 가려지자(나의 잘못이라기보다 내가 단지 앞에 있다는 이유로 벌어지는 일들), 쏟아지는 화살을 투명하게 통과해버리거나 때론 맞받아치며 불편함을 직접적으로 드러낼 수도 있게 되었다(맞받아친 뒤 무한 반복으로 그 순간을 100번은 재생해보는 타입. 그럼에도 그 순간 맞받아치지 않은 순간보다는 재생 수가 적다는 걸 기억하자).


나는 독자를 우선으로 생각하고 독자를 위한 선택과 방향을 위해 작가와 회사를 설득하고자 노력한다. 책의 내용과 관련해 타협이 되지 않는 지점에서는 작가의 의견을 미련 없이 따른다. 만드는 과정에서 아무리 치열해도, 판권에 내 이름이 있다 하더라도, 이 책은 작가의 책이니까. 최종 판단과 책임은 작가의 몫이다.

책을 위한 회사의 지원을 약속받아야 할 때는 작가와 내가 열심히 작업한 결과에 대해 회사 내부를 최대한 설득한다. 회사 밖에서야 어떻든, 회사 안에서는 작가와 내가 한 팀으로 움직이는 모습이 보여야 한다. 매번 갈등을 일으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렇다고 매번 침묵 속에 참느라 얼굴이 어두워져만 갈 것도 아니라, 의견을 가감 없이 전달하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서는 눈앞의 갈등도 피하지 않고 해결하고자 행동하는 사람이 되자.


미움받을 용기가 있다면 나는 좋은 결과를 위해서 남김없이 쓰고 싶다. 때론 독자를 위해, 때론 저자를 위해, 때론 회사를 위해서 미움받을 용기는 얼마든지 있다. 일본 천재 편집자의 문장으로 표현하자면 이렇다.

“내 목적은 어디까지나 좋은 ‘작품’을 만들어 파는 것일 뿐, 아무리 좋아하는 저자라 해도 그의 마음에 드는 것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 비즈니스는 우정 놀이와 다르다.” (230면)
<중쇄를 찍자> 만화 중에서


헷갈리면 안 된다. 우리는 ‘일’을 하기 위해서 만났다는 것을. 아무리 사적인 대화를 많이 나누었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으면 서서히 멀어진다. 저자는 더 나은 결과를 만들어줄 편집자, 회사를 찾아간다. 회사도 마찬가지. 팔리지 않는 작가를 오래 지켜보지 않는다. 편집자는 설득할 힘이 사라진다. 그런 일들에 일일이 상처받지 않아도 된다. 일이란 그런 성질의 것이기에.


그러니 좋은 사람과 좋은 결과물을 내고 싶다면, 도망치지 말고 있는 힘껏 부딪혀보자. 돌아봐도 후회가 없도록 하는 것만이 어쩌면 나에게 주어진 몫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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