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22
지난 금요일(12월 18일) 저녁, 재택근무를 마치고도 책상 위 노트북을 펼쳐두고 있었다. 밀레니얼 여성들을 위한 커뮤니티 ‘빌라선샤인’의 마지막 행사 <코로나 시대 커뮤니티의 기쁨과 슬픔>이 줌으로 열릴 예정이었다. 곧 채팅창의 열렬한 환호 속에 첫 연사인 홍진아 대표님이 등장했다.
1년 전, 한창 다니던 회사로 속이 시끄러웠을 때 시즌2 멤버로 빌라선샤인을 기웃거린 적이 있다. ‘롤모델’을 구하기보다 서로가 서로의 참조점이 되길 자처하며 자신의 일과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싶은 뉴먼(Newoman)들이 모이는 곳, 회사 밖 동료들을 만날 수 있는 곳. 무엇보다 홍진아 대표님과 황효진 콘텐츠디렉터님을 포함해 팀선샤인이 일하는 방식을 만날 수 있는 곳. 로컬스티치 소공점으로 팀선샤인과 처음 만나는 타운홀 미팅을 하러 가던 그날의 설렘은 지금도 생생하다.
어느새 다섯 명의 팀선샤인이 된 멤버들의 이야기를 차례로 듣고 있자니 이 커뮤니티가 얼마나 구성원들의 노고에 빚졌을지 생생하게 느껴졌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길 위에서 한 땀 한 땀 촘촘하게 지도를 그려온 그간의 여정 속에 감탄과 박수가 절로 나왔다. 2020년 갑작스레 시작된 전염병이라는 변수에 얼마나 치열하게 대응해왔는지, ‘서비스 종료’라는 소식에 함께 눈물짓는 뉴먼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이 바로 빌라선샤인의 증명이었다(팀선샤인, 정말 고마웠습니다).
빌라선샤인의 마지막을 함께하고 나니, 지금껏 경험했던 네 번의 퇴사가 생각났다. 누구도 정해주지 않은 길을 스스로 문을 열고 나가는 일. 그토록 아꼈던 일터를 포기하듯 두 손 들고 나오던 퇴사. 사표는 내가 냈지만 벼랑 끝에 몰리듯 심정적으로 나가야만 한다고 느꼈던 순간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지난한 감정 소모의 과정을 지금도 잊지 않고 있지만(아팠던 기억은 잊지 않아야 같은 실수를 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끝맺음이 있어 앞으로 나아갔다. 퇴사할 때마다 알을 깨는 고통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에 와 돌이켜보면 반드시 있어야 할 맺음이었다. 자발적이든 비자발적이든 졸업이 없는 사회생활에 스스로 삶의 마디를 매듭짓는 방법이 퇴사 아닐까.
나의 첫 퇴사는 비자발적이었다. 입사하자마자 첫 달 월급이 일주일인가 뒤에 나왔다. 뭔가 이상했지만 이제 막 입사한 신입에게 자세한 설명은 없었다. 이후로 다행히 월급은 나왔는데, 인세, 변역료 등이 밀려서 지급에 대한 문의 연락이 자주 왔다. 그땐 정말 내가 잘못한 것도 아닌데 벌벌 떨렸다. 번역료가 지급되지 못하니, 새 책을 내야 할 때마다 새 번역가를 섭외해야 했다. 에이전시에 도서 오퍼를 내도 선인세 지급을 차일피일 미루니, 나중에는 오퍼 금액을 올려도 에이전시 이사라는 사람이 그랬다.
“거기 이 돈 낼 수는 있어요?”
회사 사정이 어떻든 일은 해야 하는데, 일하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편집부의 편집장님, 선배들 다 다른 자리를 찾아 이직을 하고 나만 남아 있기도 했다(먼저 퇴사하신 후 자리를 소개해주시던 편집장님, 월급이 나오지 않을 때 선뜻 생활비를 빌려주신 것도 감사해요. 지금은 어디에 계시는지 잘 모르지만 제때 인사를 못해 시간이 지나면서 고마움만 더 커지네요). 다시 새 편집장님이 오시고 편집부 동료들이 왔다(그때의 동료들은 지금도 나에게 너무 든든한 언니들로 만나고 있다. 이제는 어엿한 대표님이신 언니들에게 힘찬 응원을 보냅니다). 조금 정리가 되는 듯했지만, 부도가 났다. 인쇄소 등 돈을 받아야 할 곳들이 주거래통장 거래를 막았다고 했다. 월급은 일부만 현금으로 나눠주기도 했다. 도시락을 싸고 다닌 지 오래였지만 출퇴근하는 교통비, 월세 등 미래가 막막했다.
노조가 없는 회사에서 선배들은 앞장서 사장과의 자리를 만들고, 우리의 의견을 모아 전달했다. 월급이 제때 안 나오는 시기를 반 년 가까이 버티고 있는 직원들 앞에서 사장은 그것도 못 참아주는 직원들이라고 했다. 그때 내 안의 서러움이 폭발했다. 3년을 채우고 싶었던 미련도 한순간 사라지고 2년 반 만에 사표를 울면서 썼다. 퇴사하자마자 퇴사 동료인 디자인과장님과 함께 밀린 임금 및 퇴직금 지급 소송을 걸었다. 1년의 시간 끝에 법정이자 20%까지 모두 받았다. 부도를 거듭한 그 회사와 대표는 지금도 임금 체불 기업 리스트에 올라 있다(회사는 사라진 지 오래다).
첫 직장을 나온 나는 왠지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기분이었다. 사회생활의 첫 시작을 이렇게 빡세게 해도 되는 건지. 그럼에도 이 일에 대한 즐거움과 확신이 있었고, 3년차는 어디든 갈 수 있다는 선배들의 말에 더 탄탄한 기업을 찾고 싶었다. 그러다 평소 알고 지내던 출판계 모임의 과장님을 만났다. 본격적으로 출판사를 차리고 사업을 시작하려는데 편집자로 와주면 좋겠다는 제안이었다. 제대로 내 일의 성과를 보여준 적도 없는데, 회사 밖 출판 워크숍 같은 모임 안에서 열심히 참여하는 나를 좋게 봐주신 듯했다. 편집자로 유일하다는 부담은 내 맘대로 부딪혀보면서 단시간에 빠르게 성장할 수 있겠다는 모험심에 졌다.
그렇게 막 시작하는 출판사로 이직을 했다. 그간 책이 외주 진행으로 몇 권 나온 신생 출판사였는데, 대표님(스카우트 제의를 주신 과장님), 마케터, 그리고 편집자로 나까지 총 3인 체제였다. 외부 기획위원(마치 출판계의 어벤저스 같았다)으로 6명 정도 있고, 함께 기획회의를 진행하고 편집 및 진행은 내가 담당했다. 1년 7개월간 마치 기획학교에 들어온 것처럼 바쁘게 돌아갔다.
이때야말로 거리낌 없이 누군가를 만나 책을 내자고 제안하고 회사를 설명하고 책을 만들어가는 과정을 제대로 익혔다. 나 다음에는 대표님밖에 없기 때문에 내 선에서 저자든 제작이든 담당하는 문제는 최대한 해결을 하려고 했다. 그렇게 단시간 안에 불타오르듯 일을 하다 보니 동료인 마케터가 먼저 퇴사를 했다. 다음 마케터가 들어왔다 퇴사를 하며 의지할 동료가 사라지니 더 이상 일할 동기를 찾지 못했다. 더불어 매출을 위해 해야 하는 납품용 교재 제작 등 주어진 대로 해야 할 동기를 찾지 못했고 해낼 자신도 없었다. 그렇게 두 번째 직장을 그만두었다. 마음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일할 때 가장 즐겁고, 그런 사람들이 사라졌을 때 일이 힘들어진다는 걸 뼈저리게 배운 시간이었다.
두 달 가량 쉬던 중 마침맞게 지켜보고 있던 출판사에서 문학편집자를 구한다는 공고가 올라왔다. 입사지원서를 쓰는 내내 설렜다. 매년 문학상 수상작도 나오는 대로 읽고 있었고 모 회사인 신문사에서 나오는 신문은 대학 때부터 구독했고, 주간지도 5년 이상 구독하며 읽는 중이었다. 사회를 보는 나의 시선은 대부분 이 신문사에서 만들어준 것과 다름없었다. 그렇게 세 번째 회사에 입사했다.
후배는 처음이라며 많이 아껴주시는 팀장님 밑에서 새로운 분야 한국문학에서 새로운 과정들을 겪으며 30대를 시작했다. 3년 반 동안 좋아하던 분야에서 최선을 다했다. ‘소설가’, ‘시인’이라는 이름 앞에서 오직 글로 평생을 승부 보는 사람들을 만났고 아무나 그런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라는 걸 배웠다. 그간 몰랐던 극도로 섬세한 교정의 세계를 만났다. 기획의 여지는 별로 없었다. 그저 맡겨지는 원고를 책으로 만드는 일을 되풀이하다 이건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나는 좀 더 주도적으로 일을 할 수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잠시 쉬는 중에 채용공고가 올라왔다. 대형종합출판사. 여기다 싶었다. 하고 싶은 기획을 마음껏 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막 나온 회사가 25인 정도의 규모였으니 더 큰 회사에서 체계적인 조직 시스템을 배워보고도 싶었다. 입사하고 나니 큰 회사는 다르긴 달랐다. 부서도 세부적으로 나뉘어 담당자가 존재했고(카피라이터, 법무 검토 담당자를 회사 내에서 볼 줄이야) 매달의 매출목표가 명확하게 전달되었으며 조직 내 성과가 가시적으로 보였다.
이 안에서 나는 치열한 기획회의에 매료되었다. 기획 아이디어를 어떻게든 짜내야 했고 기획회의 시간에 논의되면서 팀 내의 의견들이 다양하게 더해 발전되었다. 최종 기획안이 통과되면 실행에 어떻게 옮겨야 하는지, 책이 되기까지의 과정을 무한 반복했다. 그런 시간들이 3년이 지나자 체득되었다. 마지막 1년 반 가량은 나도 모르게 훈련이 된 그 과정이 성과로 돌아오는 기간이었다. 난생처음 올해의 책도 만들어보고 가장 성과가 좋았기에 연말 인사평가가 기대되는 가운데 사표를 썼다.
그해에 회사에서 편집자 가운데 반 정도가 그만두는 중이었다. 훈련이라는 말을 썼지만 어쩌면 쥐어짜는 사내 분위기에서 남아날 수 있는 기간이 3년 남짓인지도 몰랐다. 성과가 좋아도 안 좋아도 조직 분위기는 더없이 안 좋았다. 일 년 내내 동료들과 이별하는 날들이었다. 나는 더 일에 몰두했다. 도피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었다. 그러다 모든 것이 마무리될 때쯤 깨달았다. 더 이상 즐겁지 않다. 내년에는 더욱 채찍질 당하며 앞만 보는 경주마처럼 뛰게 되겠지, 여기서 멈춰야겠다. 그래서 그만두었다.
회사에서 배운 건 나에게 남았다. 치열하게 내 일을 고민하며 일했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 방향을 잡아야 할 때마다 직감적으로 멈춰 섰다. 나에게 시간을 주었다. 다음이 없을 것 같은 불안감은 그 안에 있을 때만 겪는 일시적인 감정이라는 것도 배웠다. 일단 문을 박차고 나오면 생각지도 못했던 인연들이 찾아와주었다. 뜻밖의 길로도 안내했고 늘 눈앞의 이익보다는 내가 잘할 수 있는 것, 재밌겠다는 생각이 드는 곳을 택했다. 처음부터 완성형보다 함께 만들어가는 길이 좋았다.
문을 열어요 일어서는 게 뭐가 그리 더딘가요
꾸물거리단 늦고 말걸요 뭐를 그리 망설이죠
각자 앞에 놓인 짐들은 잊지 말고 꼭 챙겨요
또 다른 세상에 나갈 채비를 서둘러야 해요
- 이승환의 노래 <끝> 중에서
여기가 끝인가 할 때마다 나의 시간은 나를 배반하지 않았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어김없이 또 하나의 문이 열렸다. 새로운 세상에서 새로운 나를 만나기를 늘 주저하지 않는 사람이 되고 싶다. 언제 어디서고 다시 만날 거라 믿으며 팀선샤인 분들의 새로운 모습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