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21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 책을 만들고 싶다는 생각으로 출판사의 문을 두드려 입사를 한다. 책을 마음껏 읽고 싶고 원고 앞에서 글자 숲에 얼굴을 파묻고 일을 한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수없이 상상했던…….
그러나, 현실의 편집자는 조금 많이 다르다. 원고 하나를 책으로 내기까지, 저자와의 소통, 편집부 내부와의 소통, 디자이너와의 소통, 마케터와의 소통, 제작담당자와의 소통……. 이만큼 말을 많이 하는 직업이다. 책을 만드는 일은 ‘협업’의 총체이기 때문이다. 각각의 담당자들이 혼자 책을 만들고 팔 수 없다. 누구라도 하나 빠지면 그 몫을 대신해야 하는 사람이 생길지언정 오롯이 혼자 하는 일은 ‘1인출판’이라도 잘 없다(대부분 디자인은 외주를 맡긴다).
편집자는 창의적인 업무(기획하기, 컨셉 세우기, 카피 쓰기, 제목 짓기, 저자의 원고 피드백하기)와 직업인의 기술과 제반 업무(교정교열, 저작권 확인 및 계약서(출간부터 번역, 일러스트, 외주 디자인, 교정교열 등) 작성, 각종 기안 및 지출결의서 상신 등) 사이에서 균형을 맞추며 일을 한다. 오로지 한 영역에서 일하는 것보다 스트레스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 그럼에도 어느 하나에 치우쳐 다른 부분을 등한시하기도 쉽다.
하루에도 몇 번씩 내가 나에게 주문을 건다.
일이 되게 하라.
직장인이라면 당연한 소리일 텐데 ‘편집’이라는 업무 앞에서는 어쩐지 잘 안 되는 일들이 많다. 작가님이 원고 마감을 늦추고 싶다고 합니다. 역자님이 번역 일정이 겹쳐 일주일은 더 걸린다고 합니다. 디자인 시안이 며칠 더 걸릴 듯합니다. 심지어 종이가 특수 종이여서 주문하느라 시간이 걸려 인쇄가 밀리는 일까지……. 이런 어쩔 수 없는 영역들.
내 손에서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데 한계가 있다. 그럼에도 경력이 쌓일수록 일정 관리는 더욱 철저하게, 마감일을 지켜내는 사람이 프로다(납기일을 준수하는 여러분을 편집자는 사랑합니다).
편집자가 마감일(=출간일)을 지키기 위해서는 평소에 확인 또 확인이 필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협업하는 사람들과 자주 말을 나눈다. 모르겠으면 무조건 묻는다. 완전 원고 마감일이 2주 남은 시점이라면 저자(혹은 역자)에게 메일로 마감 일정을 체크한다. 혹시라도 늦춰진다면 출간 일정을 바로 조정하고 마케팅부에게 알린다. 마케팅부는 매 달의 신간을 주요 매출로 보고 있기 때문에 출간일이 다른 달로 바뀌는 건 큰 구멍이 된다. 다른 매출 방안을 찾기 위한 시간이 필요하다. 출간 연기를 미리 알리는 것이 중요하고, 편집부 내에서는 한 타이틀이 출간이 미뤄지면 좀 더 일정을 당겨낼 수 있는 타이틀로 교체하고자 하는 노력을 한다.
이런 노력이 나는 ‘협업’이라고 생각한다. 저자/역자가 원고를 안 주는데 어쩌죠 라는 대안이 없는 말은 하지 말자. 사정이 있는 경우에는 자세히 설명해서 공감을 얻어내고 협력을 구한다. 한 배를 타고 있는 사람들끼리 서로의 고충을 헤아리며 먼저 챙겨줄 때 ‘케미’ ‘시너지’는 발생한다.
소통을 할 때는 친절한 사람이 되는 게 좋다. 내가 말을 하지 않아도 알고 있겠지, 라는 단순한 믿음이 큰 배반으로 돌아올 때가 많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는 사람으로, 말이 많은 사람으로 영혼까지 끌어올려 조잘대는 편이다(정말 정말 바쁠 때는 나도 예외다. 생각할 틈이 없을 때는 상대를 믿고 의지한다. 이렇게 맡겨두었을 때는 결과물에 대해 끝까지 믿어주는 게 중요하다).
예를 들어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할 때, 책의 내용만이 디자인의뢰서로 전달될 때 떠올리는 이미지는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다. 작가님에게 먼저 표지에 원하는 컨셉이나 생각해둔 이미지가 있는지를 묻고 디자이너에게 전달하자. 책을 여러 번 내본 작가님은 그간 작업하면서 표지를 의논하는 과정에서 마찰을 겪었을 수도 끝내 마음에 든 표지와 마음에 들지 않은 표지가 있었을 것이다. 다음에는 이렇게 해야지, 결심했던 부분을 먼저 물어본다.
처음 내보는 작가님은 평소에 좋아했던 표지 디자인을 알려달라고 요청한다. 저자의 취향을 완벽하게 따르진 않지만 수많은 길에서 한 가지 방향이 될 수 있다. 그런 의견을 미리 듣고 디자이너에게 전달을 해주는 것도 편집자의 몫이다.
또 편집자인 나도 유사도서를 참고해서 어떤 아이디어가 좋더라 하는 레퍼런스를 제공하려고 노력하는 편이다(물론 편집자에게 밑그림을 다 받아서 작업하는 디자이너도 있다. 일하면서 만나는, 생각하기 귀찮아하는 사람들은 편집이든 마케팅이든 어느 분야나 마찬가지. 매너리즘에 빠지는 건 자신의 의지로 어떻게 할 수 없다 하더라도 같이 일하는 사람에게 그런 부분을 들키는 건 매너가 없다고 본다. 함께 일하고 싶지 않은 리스트에 올리고 최대한 피한다. 서로에게 그런 사람이 되지는 말자). 관심을 먼저 오픈하면 상대도 다른 일과 다르게 하나라도 더 찾고 의논해보려는 동기가 생긴다. 이런 대화가 쌓여 좋은 결과물이 나왔을 때 서로에게 남는 뿌듯함은 더욱 커지기 마련이다.
나는 대체로 작가님께 표지 시안을 보여드리고 작가님의 의견을 비중 있게 따르는 편이다. 표지 시안이 나오면 1차적으로 편집부/마케팅 회의를 통과한 표지를 서넛 뽑아 작가님께 전달한다. 그리고 회의 때 나왔던 표를 많이 얻은 표지의 장점을 설명하고, 넌지시 작가님께 출판사의 의견을 전달한다. 이때 마케팅팀과 편집팀, 디자이너의 의견이 갈리면 갈리는 대로 솔직하게 말씀드린다. 각 시안의 장점이 다르거나 혹은 취향으로 혹은 특정 기준에 따라(제목이 확연히 잘 보이거나 표지 색이 눈에 띄는 걸 좋아하는 마케팅팀, 책 내용과 분위기를 드러낸 컨셉의 표지를 선호하는 편집팀, 새로운 시도를 보여주고 싶은 디자이너) 표는 갈리기 마련이니까.
생각 외로 표지 시안을 확정 표지로만 받아본 작가님들도 많다. 위와 같은 충분한 의논의 소통이 쉽지만은 않기 때문에 혹은 이전부터 해왔던 방식에 따라 출판사에서 생략하기도 한다. 작가님들의 경우에는 작업에 들어갈 때 편집자가 묻지 않아도 표지에 대해 나도 의견을 내놓고 싶다고 편집자에게 알려주면 된다. 함께 책을 만드는 과정에서 저자의 의견은 중요하다. 책이 나온 이후부터 저자의 홍보는 힘이 세다. 표지가 맘에 들지 않아 책이 나온 뒤에 저자부터 자랑할 마음이 들지 않게 되면 그때만큼 힘이 빠지는 일도 없다.
이런 작업 속에서 표지 투표를 SNS에 올리고 싶어 하는 작가님 혹은 출판사가 있기도 하다. 출판사와 저자의 호불호가 완전히 나뉠 때 이런 작업을 하기도 하고, 홍보로 출간 소식을 알리기 위해 오픈하기도 한다. 다만 이럴 때 디자이너에게 양해를 구해야 하는 일이 우선이다. 시안이라는 건 확정 후 좀 더 발전이 될 수 있는 상황이기도 하고 누구나 자신의 B안을 세상에 공개하고 불특정 다수에게 피드백을 받는 건 부담스러운 일이 아닌가. 한눈에 보이는 걸 골라주세요, 라고 말하는 건 주변 지인들에게 알음알음 피드백을 받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이 외에 주 소통 창구인 ‘메일’도 잘 챙겨야 한다. 메일이 들어오면 우선 열어 살피고 바로 대답할 수 없는 내용이라면 일단 잘 받았다는 회신을 먼저 보낸다. 그리고 시간이 날 때 다시 검토 후 업무를 파악하고 회신을 주는 게 좋다. 마음이 급해서 다른 일은 제쳐두고 이 업무부터 하자고 하면 나의 주 업무는 밀리고 밀려 야근으로 돌아온다. 또 나중에 회신해야지, 하고 까맣게 잊다가 재촉 연락을 받기도 한다. 한 번의 확인 메일은 서로에게 안심을 준다. 그리고 집중해서 주 업무를 하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한 팁이기도 하다.
종종 SNS에 외주 일러스트레이터, 번역가, 저자 분들이 분통을 터트리는 경우를 본다. 애써 작업한(주로 한 달 이상) 작업물을 마감일에 맞춰 보냈는데 읽기만 하고 답이 없다는 말들. 메일을 보낸 이의 입장에서 잠깐만이라도 생각해보자. 애쓴 만큼 이 결과물에 대해 편집자가 어떻게 생각할지, 그 답변이 오기 전까지 다른 일이 잘 손에 잡히지 않을 것이다. 다시 작업을 해야 할지, 수정이 있을지, 다음 일정은 어떻게 되는지 편집자에게 궁금한 것들은 무척이나 많다.
메일을 열어 확인한다.
일단 잘 받았다고 언제까지 검토 후 연락드리겠다고 메일을 쓴다.
이 습관을 들이는 것이 중요하다(나도 매번 다짐한다. 메일 읽다가 급 회의를 다녀오거나 통화를 하게 되면 회신을 잊기도 한다. 잊었을 때는 양해를 구하고 빠르게 검토해 연락을 드리는 걸 업무 목표로 삼는다). 때로는 하루 일과 시작 전에 어제 받은 메일 리스트를 살피다가 답장을 안 보낸 메일을 찾기도 한다. 그때라도 메일을 보내고 양해를 구한다. 사소하게 놓치거나 무시했던 부분이 큰 일이 되어 돌아온다. 혹은 사소하게 챙겼던 일이 후에 큰 보답으로 돌아온다. 어떤 선택을 할지는 오늘 나의 몫이다.
여기저기 입장 사이에 끼어 새우등이 터지기 마련인 편집자. 나의 친한 동료 언니는 일하면서 만나는 누구 앞에서나 ‘을’인 편집자의 운명이란 이야기도 했다. 언제나 조율하는 중개자이자 프로젝트를 끌고 나가야 하는 운명이 ‘책임 편집자’에게 있다. 그리고 그만큼 큰 보람도 편집자에게 있다.
협업은 여러 사람들의 흩어져 있던 마음을 하나둘씩 모아 큰 힘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땅, 불, 바람, 물, 마음… 다섯 가지 힘을 하나로 모으면…?). 때론 포기하기도 하고 때론 끝까지 끌고 가기도 하면서 결과물이 나왔을 때 모두가 한 걸음씩 앞으로 나아가 있는 모습을 상상한다. 지금껏 해보지 않았던 즐거운 작업을 한번 해보자고, 선뜻 손을 내밀 수 있는 동료이자 편집자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