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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디터리 Dec 08. 2020

책을 만드는 일이 좋은 이유

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20

책을 만드는 일을 선택한 편집자 동료들을 관찰해보면 공통점이 있다.


성실하고 책임감이 강하다.


‘성실하다’는 말은 책상 앞에 앉아 텍스트를 보고 또 보면서 문장과 단어 사이에서 저자의 뜻을 가늠하며 보다 적확한 언어를 찾아주는 데 게으르지 않다는 뜻이다. 일정 기간을 두고 교정을 반복해서 보는 일은 웬만한 인내심으로는 힘든 일일 텐데, 보통의 편집자들은 자신과 교정지, 둘만 남는 시간을 기다린다. 말의 세계에서 벗어나 언어의 세계, 글의 세계에 몰두하는 그 시간의 맛을 아는 사람들. 이미 알고 있던 단어도 다시 한 번 검색해보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표준국어대사전 검색창이 생기기 이전에 종이 사전으로 교정을 보았을, 앞선 선배님들의 땀과 눈물에 박수를). 말없이 몇 시간이고 끈질기게 앉아 밭에서 돌을 고르듯, 한 땀 한 땀 박음질을 하듯 그런 시간이 쌓여야 고른 문장이 되고 읽는 데 멈칫하지 않는 책이 된다.


책임감은 내가 무심히 넘긴 부분에 누군가 걸려 넘어질 것을 염려하는 마음이다. 책을 읽다가 독자들의 마음속에 떠오를 수 있는 물음표를 미리 걷어내는 일. 내가 묻지 않으면 독자들도 똑같이 답답해할 부분을 미리 해소하는 일. 사실을 확인하고 인용 부분을 대조하고 저자에게 한 번 더 질문하는 일. 편집자는 어리석은 질문을 두려워하면 안 된다. 모르는 것은 일단 물어보는 것이 나중에 후회를 더는 일이다. 원고 상태인 지금 물어보지 않으면 책이 출간된 이후에는 바로 잡을 시간이 잘 주어지지 않는다(일단 초판을 다 팔아야 하는데…… 슬프게도 1년 안에 초판을 파는 일이 여간 쉽지 않다). 책이 출간되기 전까지 최선을 다해 마감하려는 이유다.


이 일의 힘듦도 보람도 여기에 있다. 무엇보다 실체가 없던 한 사람의 생각이 물성을 가지고 손에 잡을 수 있는 ‘책’이 될 때 느끼는 성취감은 크다. 한 권의 책이 되어 손에 쥐어질 때마다 지난 시간이 형태를 지니고 눈앞에 나타난 마법 같다. 흘러 사라진 게 아닌, 시간의 증명. 그리고 그 마법에는 ‘일’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숨어 있는, 편집자인 내 눈에만 선명하게 보이는 ‘마음’이라는 게 있다.

성실과 책임의 의무를 다하게 만드는, 작고 반짝이는 마음.


책을 만드는 첫 마음을 생각할 때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책이 있다.

2019년 4월에 출간한 임진아 작가님의 『아직, 도쿄』.

2016년 10월, 처음 임진아 작가님에게 메일을 썼다. SNS에 종종 보여주신 도쿄 여행과 일본어 공부하는 모습을 잘 보고 있다, 작가님의 그림과 글이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을 것 같다고.

다른 책의 삽화를 막 그리기 시작했던 작가님이었지만, 나이도 얼굴도 모르고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도 아니었지만, 트위터를 통해 도쿄 여행 소식을 종종 보았고, 사적인서점에서 일본어 수업도 듣는 사람이자, 독립출판물을 내는 그림 그리는 사람, 글을 어느 정도 쓰는가는 잘 몰랐지만 독립출판물을 꾸준히 작업하며 자신의 이야기를 29cm에도 연재하고 있는 사람으로 아는 상태에서 만남을 청했다.


작가님을 만나기 전, 나는 일본 여행에 필요한 일본어를 함께 익히며 도쿄 여행을 그림 에세이로 풀면 좋겠다고 기획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기쁘게도 첫 미팅을 했던 날(장소는 작가님의 단골 카페인 스몰 커피), 내가 그려온 밑바탕을 작가님과 마주 앉아 수정의 선을 더해 도쿄를 여행하는 책을 만들어보자고 의기투합했던 날. 매달 그달의 분량인 원고와 그림을 보내주던 작가님의 메일. 파일을 여는 순간, 잿빛 파티션은 사라지고 단숨에 작가님을 따라 도쿄의 공원을 걷던 신기한 경험. 곧장 나의 생생한 감동을 메일로 전송하던 시간이 매달 정직하게 쌓였고, 그 시간들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도쿄를 그리워하는 독자들을 만나고 있다.


기획의 시작은 편집자의 상상력에서 출발한다. 작가가 어떤 사람인지 잘은 모르지만 매력부터 알아본 마음이 원동력이 된다. 세상에 내어놓은 정보들을 모으고 모아서 제멋대로 그 사람을 상상하고, 그 사람이 쓸 수 있는 이야기에 대해 여러 방향으로 기획 아이디어를 적는다. 그리고 관심이 있으시다면 미팅을 해보자고 제안하는 메일을 쓴다. 타이밍이 안 맞을 수도, 내가 상상했던 방향이 매우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 모든 과정은 기획의 순간이고, 그 타율이 정확해질 때마다 조금씩 기획자로 완성되어간다.


2020년 올해에도 자랑하고 싶은 고마운 인연이 생겼다. 오래 흠모하던 김민철 작가님이 책을 쓰고 싶은데 검토해주겠느냐고 이야기를 해준 날, 그 자리에서 만화처럼 튕겨 오를 뻔했다. 지난 4년간 작가님 곁을 기웃거리며 맴맴 돌았던 시간이 눈앞을 스쳤다(편집자로서보다는 순수한 팬심이었다, 정말입니다). 샘플원고를 감사히 받고, 아무렴요! 감사합니다, 작가님! 하며 계약서에 도장을 찍은 시간이 지나, 어제 아침 출근길에 중간 원고를 보내니 살펴봐달라는 연락을 받았다.

그럼요, 아무렴요, 하고 겹겹이 쌓인 스케줄이 시작되기 전에 원고부터 열었다. 그리고 곧 한 편마다 담긴 이야기에 웃다 눈물이 핑 돌다 마음이 어지러웠다. 회의를 하고 원고를 읽고 잠시 급한 일을 처리하고 또 원고를 읽다 퇴근하기 직전에야 보내주신 12편을 다 읽었다. 작가님께 이 감상을 어떻게 전해야 할지 고민하며 메일 창을 띄웠다. 그리고 이렇게 적었다.


작가님, 제가 이 원고를 받으려고 지금까지 편집자를 하고 있었던 것이군요!


용기를 내어 누군가에게 던진 마음이 눈앞에 한 권의 책이 되는 경험.

이런 일은 ‘일의 세계’보다 ‘마음의 세계’에 더 가깝다. 그래서 이 일이 좋다고, 잘하고 싶어서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애쓰고 있는가 보다.


덧. 김민철 작가님의 원고는 내년 이른 봄에 책으로 만나요.

벌써부터 신난 편집자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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