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27
라디오를 한창 듣던 시절이 있었다. 가장 오래된 기억 속의 디제이는 차태현. 고2, 3 시절 야간자율학습 시간은 소라 언니(가수 이소라) 목소리를 들으며 견뎠다. 가끔 디제이들이 ‘우리 작가가’라고 불러주는 게 참 좋아 장래희망에 라디오 작가라고 친구들 몰래 적기도 했고. 짝사랑 고민도, 친구과의 사소한 다툼도, 까닭 모를 외로움도 디제이와 나누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전국에서 보내오던 마음들을 읽던 시간.
디제이의 선곡은 내가 모르던 음악을 알려주었다. 메모해두었다가 다음 용돈을 받으면 레코드숍으로 달려갔다. 그렇게 유희열을 비롯한 유재하경연대회 출신의 뮤지션들을 알아갔다. 박학기의 <여름을 지나는 바람>을 들으면, 여름밤 고3 야자 시간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던 서늘한 바람을 맞던 그때 그 기분이 언제든 되살아난다.
언제부터인가 라디오를 잃었다. 가만히 귀 기울여 이런저런 사연을 듣고 공감하던 시간이 사라졌다. 한 달 구독료만 내면 음악을 100곡씩 다운받을 수 있다고 했다. 음악이 흔해졌다. 취향과 상관없이 ‘멜론 top 100'을 다운받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신곡을 들을 기회이기도 했지만 다음 달이 되면 어김없이 사라졌다. 반짝 등장했다가 사라지는 가수들과 노래들. 한 곡에 들이는 시간과 비용이 모두 허탈해지는 환경이 되면서 아마도 적당히 타협한 노래들이 많아졌겠지. 악기를 하나씩 녹음하며 쌓인 소리가 아니라 디지털로 대체된 소리에 우리는 익숙해져갔다.
책을 만드는 환경도 이와 비슷하게 서서히 바뀌어간다. 2007년에는 있었던 ‘필름 검판’이 사라지고 출력실에서 만든 PDF를 최종 확인 후 바로 인쇄용 판 출력으로 넘어간다. 데이터를 넘기고 다음 날 출력실에서 필름을 돌돌 말아 박스에 보내주면, 라이트박스를 켜고 한 장씩 올린 뒤에, 대지 위 32페이지씩 앉혀 있는 페이지를 배열표에 맞게 순서대로 빠진 것이 없는지 확인했다. 오타 중에 ‘이’가 ‘어’로 된 경우에는 필름 출력비가 아까우므로 가운데 선을 칼로 섬세히 긁어내는 작업도 얼마나 집중해서 했던지.
필름은 한 번 뽑은 뒤에는 재쇄 때 수정이 있으면 페이지만 출력해서 손수 따서 붙이는 작업으로 실물이 있었다(그래서 우리 판권에 ‘초판 1쇄’라는 게 있는 게 아닌지. 다시 필름을 뽑을 때는 ‘재판’, ‘3판’이 되는 것). 지금은 PDF를 페이지 갈아 끼우는 식으로 화면상에서만 진행된다. 가끔 저자가 책 절판을 원하는 경우에는 ‘안 찍겠다’는 출판사의 말보다 필름을 회수해가는 것이 더 명확한 일이 되기도 했다. 디지털 파일로만 존재하는 요즘은 불가능한 이야기다.
책값이 비싸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리고 전자책 업체에서 주로 ‘북클럽’이라는 이름하에 ‘한 달 무제한 독서’를 외치는 풍경을 심심치 않게 본다. 책 한 권을 만드는 시간과 비용을 아끼고 신간을 내서 매출을 만들어내는 일. 쳇바퀴처럼 계속 돌고 도는 일 사이에서, 한 권의 책이 독자들에게 선택받는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을 한다. 구독제 서비스라면 책을 더 많이 읽을까. 나부터도 신청해두고 두 권 이상 읽는 게 쉽지는 않았다. 다만 나만의 도서관처럼 참고도서를 간단히 찾아 검색을 하고 필요한 부분을 발췌독하는 정도의 서비스로는 좋았다.
휴대폰이든 패드든 전자기기를 이용해 읽는 건 어쩐지 읽는 습관부터 다른 느낌이었다. 종이가 아니라 화면 위 단어들을 겅중겅중 건너뛰며 필요한 부분만 습득해버리며 빠르게 페이지를 넘겼다. 속도가 달랐다. 그렇게 읽고 나면 내가 집중해 읽을 만한 것이 느낌상 많은가 많지 않은가에 따라 책의 인상을 갈랐다.
어쩌면 유튜브 시대의 문법 같다. 예능 프로그램을 보아도 오프닝부터 시작해 출연진들의 근황 토크로 이어지다 중간에 문득 토크의 흐름을 타고 웃음이 터지기도 하고 그날의 미션을 수행하고 성공 혹은 실패를 하고 다음 주를 약속하는 이야기가, 지금의 시청자들에게는 너무 길다. 다짜고짜 하이라이트 웃긴 부분만 보고 싶다. 클립으로 즐기는 시대다. 기승전은 지루하기만 하고 그걸 다 보고 있을 인내심은 없다. ‘결’로만 가득한 콘텐츠에 둘러싸여가는 사람들에게 책 한 권의 의미는 서문부터 넘기기 쉽지 않다.
전자책은 종이책의 의도를 흐트러뜨린다. 한 페이지 안에 담고자 했던 편집의 묘(妙)도 사라지고(스크린 크기에 맞게 자유자재로 페이지는 변경된다), 이미지의 위치나 크기도 달라진다. 서체는 디지털에 최적화된 서체로 사용자가 익숙한 것으로 고르고 크기도 필요에 따라 키울 수 있다. 종이책의 미감(美感)은 사라지고 본체만 남는다. 종이를 고를 때 미색과 백색의 차이나 손에 닿는 질감 등을 고민하던 시간도 증발된다. 보다 편리한 휴대성과 가독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이런 변화가 독자의 확장을 가져올까. 책을 읽는 습관을 가질 수 있는 쉬운 환경을 제공할까. 혹시 사회가 4G, 5G처럼 속력에만 몰두하고 있는 건 아닐까. 주어진 시간 안에 보다 많은 책을 읽고 ‘가성비’를 생각하지는 않을까. 이토록 속도와 양이 중요하게 여겨지는 일상에서 숨이 가쁜 건 나뿐일까.
그럴 때마다 눈앞에 있는 종이책에 손을 뻗는다. 나의 속도에 종이책 페이지를 넘기는 손의 속도가 따라온다. 조금 생각할 부분이 있으면 손은 잠시 쉬어간다. 종이 위에 인쇄된 글자의 서체 생김을 보면서 편안한 감상, 다정함을 느끼기도 하고 낯선 서체의 의도를 생각하기도 한다. 연필로 밑줄을 그으며 연필심의 촉감을 느끼고 마지막 장을 덮으며 책 뒷표지에 적힌 문장들을 순서대로 읽고 여운을 정리한다. 이런 일련의 독서 과정이 전채요리부터 디저트까지 마치는, 애써 시간을 내어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낭만과 여유가 되어버린 걸까.
공테이프를 끼우고 조심스레 녹음 버튼을 누르던 마음은 흘러가버릴 시간을 붙잡으려는, 디제이와 내가 공유하고 있는 이 순간의 증거를 남겨두려는, 전파라는 헛깨비가 사라진 뒤에 찾아올 망각에 저항하려는 애틋함이었다. (...) 매일 함께해서, 일상의 이야기들을 주고받아서, 마음을 나눠서,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어서. (p.67, <내가 사랑하는 지겨움>, 장수연)
라디오 PD인 장수연 작가의 에세이를 읽으며 세상의 속도에서 밀려나고 있는 업의 끝자락을 붙잡고 있는 사람으로, 그럼에도 그 매체를 너무나 사랑하는 사람이라는 점에서 무척 공감을 했다. 어쩌면 책을 읽는 행위도, 뭐하고 사는지 모르겠는 하루하루 속에서 하나의 깃발을 꽂고 그날의 기억들을 함께 기억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 책을 읽을 때 한창 이런 고민을 하고 있었지. 누굴 만나기 위해 나갔던 광화문에서 이 책을 발견한 거야. 등등.
언제나 불황이라는 출판계에서, 독자들은 쉽게 사라지는 듯하다. 하지만 나는 오늘도 뭔가 헛헛해서 채우고 싶어 뭐라도 읽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도 안다. 그 사람들에게 찾고 있던 무언가를 건네주고 싶다.
아직 손에서 책을 놓지 못한 독자들을 위한 책을 만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