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편집자 에디터리 - 편집자는 무슨 일 하세요 28
저자와 만나 책을 함께 만들기로 하고 인고의 세월이 지나 어느새 완성 원고가 눈앞에 도착한다. 원고를 대여섯 번씩 읽으며 컨셉을 잡고 교정교열을 하고 디자인 시안이 나오고 최종 표지를 선택하고 인쇄까지 마치면, 어제까지 없던 한 권의 책이 탄생한다. 여기까지의 과정도 시간과 정성이 참 많이 드는 일이다. 적게는 1년, 오래 걸리려면 끝도 없는 기다림의 시간. 그런데 당연히 끝이 아니다. 이제 정말 머릿속으로만 그리고 있던 ‘독자’의 실체를 만나러 가야 한다.
책이 나오고 나면 출판사 마케터들은 실물을 들고 서점 MD나 구매과를 방문한다. 각 서점별로 이 책을 몇 부나 팔 수 있을지 고심하는 시간이다. 서점에서는 판매 예측을 통해 일정 부수를 주문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판매가 안 되는 책은 출판사로 고스란히 반품이 된다. ……반품? (반품된 책은 일련의 재생 과정(도매업자가 찍은 도장 제거, 손상된 띠지 제거, 표지에 묻은 얼룩 제거 등)을 거쳐 재판매를 위한 준비를 한다. 이 과정에서 파손되어(표지가 구겨진다거나 찢어지는 등) 재생 불가의 상태로 버려지는 책들도 많다. 눈물이 난다)
출판사에 들어와서 가장 먼저 듣는 말은 ‘위탁 판매’다. 출판사는 독자를 직접 만나지 않는다(출판사는 업종도 ‘제조업’이다). 상품을 만들어 판매를 담당하는 서점에 보내는, 판매를 제3자에게 위탁하는 방식이다. 이렇다 보니 서점에 팔리지 않아도 서가에 꽂히거나 매대에 깔린 책들을 포함해 출판사에서는 ‘출고 부수’로 대략의 판매 사이즈를 추산한다. 물론 월말마다 정산되는 판매금액이 있다. 다만 서점에서 알아서 판매를 정산하다 보니, 전국 서점으로 간 책들이 다 팔린 것인지 아직 서점에 책이 남아 있는 것인지 출판사로서는 알 수 없다. 그래서 책의 정확한 판매 부수는 아무도 모른다, 는 말을 작가나 출판사 관계자들이 종종 한다.
위탁 판매의 가장 치명적인 부분은 출판사에서 ‘독자 정보’를 모른다는 것이다. 내가 기획안을 쓰면서 ‘2030 여성 독자층’이라고 썼는데 정말 나이대가 2030인지, 2535인지, 4050인지 알기 어렵다. 그나마 온라인서점에서는 SCM(Supply Chain Management)이라고 해서 성별과 나이대가 나오기는 한다. 그래도 요즘 독자들은 리뷰를 성실히 남기는 편이어서, 블로그나 서점 서평, 각종 SNS를 돌며 독자들이 어떤 관심사로 책을 구매했는지, 어디서 샀는지, 어떻게 읽었는지 관찰할 수 있다(리뷰를 성실히 남겨주시는 독자님들, 복 받으실 거예요). 열심히 만든 책이 가장 필요했던 누군가에게 가 닿았을 때, 그 감동을 주체 못하고 ‘담당 편집자입니다.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라는 댓글을 남기기도 한다(주책 맞은 저를 용서하소서).
책은 어떻게 팔아야 할까.
늘 하던 고민을 새해 들어 또 새롭게 하다가 ‘책을 읽는 습관’을 파는 북클럽을 보았다. 김소영 전 아나운서가 창업한 서점 ‘책발전소’에서 운영하는 브론테Bronte. 이 달의 선정 책과 더불어 북 큐레이터인 김소영 대표가 정성스레 쓴 편지가 함께 도착한다. 어떤 책이 선정될지 모르는 상태에서 주문을 하고 책이 도착하는 날을 괜시리 손꼽아 기다리게 된다. 내가 결제했지만 나에게 오는 뜻밖의 선물 같은 묘미.
이번 2월의 도서는 서유미 작가의 소설 『우리가 잃어버린 것』이었다. 흔히 세상에서 ‘경력 단절’이라는 딱지를 붙인 서른 후반의 기혼 여성이자 아이 엄마인 경주의 이야기가 담담하게 흐른다. 어떻게 보면 이 평범한 이야기를, 큰 사건 없이 관찰 다큐처럼 흘러가는 소설을 왜 읽어보면 좋을지, 네 장이나 되는 편지 안에는 김소영 대표가 다정하고도 솔직한 마음이 담겨 있었다. 막 사업을 시작한 즈음 경험했던 출산과 (현재 진행형인) 육아와 더불어 일을 해내야 했던 진솔한 경험. 늘 엄마에게는 힘에 부치는 육아와 직장 생활이 한 개인의 ‘의지의 영역’으로 시험대에 오를 때마다 느꼈던 죄책감과 상처 속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키기 위해 앞으로 나아갈 힘을 얻기 위한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게 자신에게는 책을 넘기는 시간이었다고. 평범한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나’와 가장 가까워질 수 있으니, 좋은 문학의 힘을 느껴보라는 다독임으로 편지는 끝을 맺었다.
나를 위한 변화를 주고 싶어서, 책을 읽고자 하는 계기를 만들기 위해, 독자들은 북클럽을 찾는다.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모를 때, 책을 먼저 읽고 추천해주는 믿을 만한 사람이 있다면 한 번 더 그 책을 눈여겨보게 된다. 하물며 서점을 자신만의 색깔로 채워가고 있는 대표의 제안이라면, 그 서점이 평소에 자신이 좋아하는 취향을 담고 있는 공간이었다면 이 기회에 책을 읽는 습관을 가져보자는 다짐을 이룰 수 있도록 한 발 더 나아갈 수 있다. 책발전소북클럽에는 1주마다 읽어야 할 분량과 생각해볼 질문이 담긴 키트가 같이 온다. 가벼운 의무감은 새로운 습관을 시작하기 적당한 동력이 된다. 브론테 홈페이지에 매주 댓글(1000자 내외)을 달며 자신의 감상을 나누고 댓글을 달며 느슨한 소속감을 갖는다. 책을 읽고 난 뒤 다른 사람들은 이 책을 어떻게 읽었을지 궁금해질 때 함께 달리는 러닝메이트 같은 북클럽 사람들이 남긴 글을 읽어볼 수 있다.
책 처방을 제일 먼저 도입한 사적인서점에서도 ‘월간 사적인서점’을 운영하고 있다. 소설과 산문에는 김달님 작가가, 시는 한정원 작가가 매달 정성껏 고르고 소개 편지를 쓴다. 시 혹은 소설/산문 분야에서 3개월 구독을 하면 매달 책싸개로 고이 포장된 책 선물이 도착한다. 어떤 책이 마침맞게 운명처럼 도착할지 모를 일이다. 누군가 아끼는 사람을 위해 선물용으로 구독을 하기에도 좋을 것 같다. 매달 1일 도착하는 ‘뜻밖의 즐거움’을 받으며 보낸 이를 떠올려줄 거란 상상만으로도 뿌듯하지 않은가.
가장 이상적인 것은 적은 비용으로 많은 판매를 이끌어 내는 고효율 프로모션이겠지만, 대개는 돈을 쓴 만큼의 효율을 거둔다. 심지어 돈을 많이 썼는데 마지막에 주판알을 튕겨 보면 그다지 효과가 안 난 고비용 저효율 프로모션도 허다하다. 생각해 보면 도서 프로모션은 팔리지 않는 책을 갑자기 1~2천 부 팔리게 하는 치트키 같은 것이 절대 아니다. 그냥 두면 2천 부 정도 팔릴 책을 좀 더 알리면 1천 부 정도 더 팔 수 있다는 확신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 본질이다. 적은 비용으로 높은 효율을 낼 수 있으면 제일 좋겠지만, 판매에 대한 기대가 큰 책일 경우 비용을 더 과감하게 써야 극적인 효과가 날 확률도 높아진다.
p.23 <책 파는 법>, 조선영 지음, 유유출판사
책을 팔기 위해 '뭐든지 다 한다'고 해서 'MD'라고 부른다던데, 이 책을 읽다가 저 문장에 밑줄을 쳤다. ‘2천 부 팔릴 책을 1천 부 더 파는 것’이 도서 마케팅의 본질. 애초에 판매 사이즈를 염두에 두고 책을 만들 수 없고, 책을 보자마자 마케터와 MD가 느낄 판매의 예측을 편집자는 최대한 높이는 방향으로 만들어야 한다. 기획 단계부터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질 만한 이유와 의미가 있는지 찾고, 원고 상태에서 조금 더 독자와 가까워질 수 있는 부분은 없을지 구석구석 바라보고 고심해야 한다. 좋은 내용만큼 매력적으로 보이게 카피를 쓰고 당신이 이 책을 왜 읽어야 하는지, 이 책만이 가진 특장점을 알게 해야 한다.
새 책이 나오고 반응이 미미할 때마다 책을 만든 편집자는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책을 쓴 저자만큼 아프진 않더라도 말이다). 편집자는 책을 내기 위해 숨은 ‘의미’들을 부여하며 한 권을 완성했는데, 그토록 그리던 독자가 없다는 사실에 그간 들인 공이 허무해지기 쉽다.
그럴 때 어디선가 사람들이 모여 한 권의 책을 읽고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기운이 난다. 책을 만든 내가 밑줄을 그은 문장을 거짓말처럼 똑같이 뽑아주는 독자들을 보면 기분이 좋다. 좋은 책은 언젠가 발견해줄 거라는 믿음이 막 출근해서 앉은 나의 척추를 세울 만한 힘이 되어준다.
그렇게 당신을 만날 생각을 하며 오늘도 열심히 출근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