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만들다 떠오른 이야기
일고여덟 살 무렵, 밤 근무를 끝내고 낮에 자고 있는 아빠는 늘 천원을 주셨다. 나는 잃어버릴 새라 천원을 손에 꼭 쥐고 신나게 달려 비디오 가게로 향했다. 벽면을 가득 채운 비디오들 중에 초록색 띠를 두르고 있는 거라면 맘모스를 잡으러 모험을 떠나는 꼬마 고인돌 빠삐꼬, 늘 유쾌한 호호 아줌마와 같은 만화도 나 같은 어린이가 주인공인 영화도 무엇이든 선택할 수 있었다. 베스킨라빈스 31의 아이스크림 고르기보다 훨씬 더 선택지가 많았던 그때의 두근거림이란.
그러다 좀 더 크고 난 뒤, 크리스마스 즈음에 동생과 볼 영화를 골랐는데 제목도 정직한 「산타클로스」(1995)였다. 얼굴만 봐도 웃기게 생긴 아저씨(팀 알렌)가 귀여운 아이와 썰매를 타고 허공을 가르는 표지에 기대감이 부풀었다. 산타클로스가 실제 있는지에 대한 고민은, 유치원 크리스마스 행사 중 어제 엄마랑 골랐던 나의 핑크부츠를 들고 온 어설픈 수염의 산타클로스를 마주했을 때 진즉에 결론을 내린 터였다. 내 눈에는 누가 봐도 가짜였던 수염 사이로 원장 선생님의 턱에 있던 검은 점이 수박만 하게 커보였으니까. 영화를 고를 때만 해도 산타클로스라는 존재에 대해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영화는 장난감 회사 마케팅 팀장인 주인공 스캇 캘빈이 이혼을 했고 아들 찰리와 단 둘이 크리스마스를 보내게 된다. 산타의 존재를 “어린애나 믿는 거”라고 말하는 찰리의 눈앞에 크리스마스이브의 밤, 산타클로스가 지붕에서 떨어진다. 얼결에 산타의 옷을 입고 그날 밤 썰매에 쌓여 있던 선물들을 대신 배달한 스캇과 찰리, 산타의 썰매는 이들을 데리고 요정들이 사는 북극으로 향한다.
그곳에서 스캇과 찰리는 산타의 옷을 입은 사람이라면 산타의 역할을 받아들인 계약이 성립된 거라는 설명을 해주는 요정 대장 버나드를 만난다. 그리고 나는 실재하지 않는 요정 대장 버나드에 한눈에 반한다. 만날 일이 없고 이 영화 이후의 소식도 알 수 없는 미지의 배우에게. 아니 실은 영화 속 산타 기지에서 모든 걸 총괄하고 있으며, 산타가 되어야 한다는 현실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스캇에게 계약서 조항을 읊는 똑똑하고 늠름한 요정에게. 버나드가 떠오른 건, 지금 열심히 만들고 있는 책 속 주인공이 연극 피터 팬을 본 최초의 기억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자신의 머리 위를 날던 초록색 옷을 입은 사람. 내 기억 속 요정 버나드도 초록색 옷을 입고 있었다.
막 사춘기 시절에 진입할 무렵, 듣는 이야기라고는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공부를 열심히 해야 한다, 부모님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한다는 말들이 쏟아졌고 난생처음 위염도 앓았다. 그렇게 엄마를 졸라 등록했던 피아노 학원은 스스로 그만두게 되었고 그런 압박감 속에 하루하루 교복을 입은 나에게 적응하며 학교를 다니던 때였다. 친구들과 수다를 떠는 게 제일 좋은데 내 맘 같지 않은 친구들과의 사이는 틀어졌다 다시 친해졌다를 반복했고, 이유 없이 미워지고 싫어질 때마다 마음 속 친구 버나드에게 말을 거는 날들도 있었다.
버나드에게 빠졌던 시기가 오래 가지 않은 건 얼마 지나지 않아 H.O.T가 데뷔했기 때문이다. 「전사의 후예」 때는 그렇게까지 주목을 받지 않았는데 「캔디」가 나오고 나자 세상이 뒤집혔다. 교실에서는 쉬는 시간마다 떼창과 댄스가 벌어졌고 여자아이들은 삼삼오오 모여 앉을 때마다 최애 멤버 이야기를 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TV를 틀면 H.O.T가 나와 노래를 부르거나 다큐 속에서 등장하거나 예능에 나왔다. 친구들은 앨범을 사기 위해 밤새 레코드샵 앞에 줄을 서고 있었고(누구보다 빠르게 손에 넣는 게 중요했다), 희준이 부인, 토니 부인으로 서로를 불렀다. 엑스포 광장에서 공개방송이 열렸던 날, 땡볕에도 하얀 우비를 입고 하얀 풍선을 흔들던 수많은 팬들의 함성소리는 그간 쌓였던 에너지를 폭발시키는 듯했다.
그렇게 시대의 흐름에 맞춰 H.O.T를 좋아하는 한편, 늘 아싸를 자처하던 친구의 영향으로 이승환의 앨범 「His Ballad」를 사게 되고 그날로부터 지금까지 나의 음악 스타일은 고정이 된다. 이승환을 좋아하다 천재 뮤지션 이규호를 만나고 조동익, 조동진, 장필순 등 하나음악을 알게 되고, 유재하 음악경연대회 출신 가수들이구나 알게 된 이후 유재하를 듣고, 규호오빠가 좋아하는 박학기를 듣고.
감정을 제거한 채 공부만 하라고 하는 어른들의 재촉에 마음이 메마르지 않게, 살기 위해 음악을 들었던 것 같다.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던 노래 가사를 받아 적고, 야자 중 쉬는 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리면 다른 반에 있는 친구를 찾아 복도를 달리고, 그 친구의 손을 잡고 중정원으로 내려가 벤치에 앉아 이어폰을 나눠 끼고 음악을 감상하며 올려다보던 까만 벨벳 같던 밤하늘.
소설 속 주인공은 마이너스에서 0이 되기 위해 최애에게 매달린다. 최애는 유일하게 자신에게 허벅지가 있고 땀이 솟는 몸이 있다는 걸 느끼게 한다. 그렇지,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살아 있음을 느끼게 한다. 내 심장이 이렇게 뛰고 있음을 깨닫고, 눈물이 터질 것 같은 뭉클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마음은 시간이 지나 열기가 가라앉았을지언정 언제 어떤 상황에서도 되살아나 행복한 추억을 자동 재생한다.
그 시절의 해맑던 친구들의 웃음, 예쁜 글씨로 적어주던 쪽지들, 함께 있을 때면 세상 두려울 게 없이 솟아나던 용기. 이제는 각자의 자리에서 어른의 몫을 해내고 있는 친구들과 언젠가는 추억 여행을 같이 하고 싶다. 그 시절 음악을 내내 들으면서 목청껏 따라 부르며 맘껏 몸을 흔들고 싶다. 아직 우리의 빛나는 시절이 끝나지 않았음을 확인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