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중앙박물관은 야외전시장도 볼만한 포인트입니다. 일부 석조 건축물이 실내 공간에 전시되어 있지만, 석조 건축물은 날씨와 빛에 따라 보이는 것이 다릅니다. 실내에서 보는 석조 건축물은 김 빠진 맥주 같습니다. 특히 소지품 검사받으며 테러범 취급을 받기 싫으신 분들은 야외전시장이 좋은 선택입니다.
야외전시장은 오전 7시부터 관람이 가능합니다. 숲길과 어우러져 있는 전시장은 천천히 걸으셔도 한 시간이면 충분합니다. 야외전시장은 크게 부도와 탑비를 전시한 박물관 앞 공간 부분과 석탑을 전시한 정원 부분으로 나뉩니다.
시대와 지역이 다양한 문화재들이 한자리에 전시되어 있어 비교해보면서 감상하기 좋은 장소입니다. 물론 뚜렷한 목적을 갖고 모은 유물들은 아닙니다. 요즘 이야기되는 이건희 컬렉션같이 수집가의 의도가 있지 않다는 이야기지요. 왜 이런 조합이 되었는지는 나중에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주요 전시물을 소개합니다. 탑비 및 부도로는 원주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및 석관(보물 365호), 전 원주 흥법사지 염거화상탑(국보 104호), 양평 보리사지 대경대사 탑비(보물 361호),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탑(보물 190호), 창원 봉림사지 진경대사탑비(보물 363호) 및 승탑(보물 362호), 충주 정토사지 홍법국사 탑비(보물 359)와 승탑(국보 102호)이 있습니다.
탑비와 승탑은 일반인들이 볼 때 그냥 무덤의 비석이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주인이 누군지 분명히 기록되어 있어 건립 시기가 뚜렷하기 때문에 사료적인 가치가 뛰어납니다. 비문 역시 당대의 문장가와 서예가의 솜씨로 되어 있어 금석학적으로도 중요하지요. 또한 석탑에 비해 다양한 암석을 사용해서 이를 보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석탑 등으로는 개성 남계원지 칠층석탑(국보 100호), 김천 길항사터 동서 삼층석탑(국보 99호), 여주 고달사지 쌍사자 석등(보물 282호),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보물 358호), 홍제동 5층 석탑(보물 166호) 등이 있습니다. 이밖에도 소품으로 석양, 문인석, 장명등과 온녕군 석곽, 태실 석관 등이 산책로를 따라 전시되어 있습니다.
각각의 유물에 대한 내용은 다음에 소개할 기회가 있으면 다루기로 하겠습니다.
대부분 폐사지에 있던 유물들로 폐사지는 지금도 찾기 힘든 곳입니다. 이렇게 모여 있어 한 번에 돌아보기가 매우 편리하지요. 게으른 답사자에게는 꿈같은 장소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유물별로 따로 답사를 다녀야 해서 한 달에 한 곳만 본다고 잡아도 족히 1년 넘는 시간이 걸릴 것입니다(저는 특히 원주 인근 폐사지 유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물이 원래의 자리에 있어야 만들 당시의 지리적인 방위, 주변 지세 건물과의 관계 등을 파악할 수 있습니다. 뿌리가 뽑혀 덜렁 몸만 옮겨와 있으니 상상력을 발휘할 여지가 없게 됩니다. 가장 좋은 것은 원래의 자리에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설령 그 자리가 지금의 자리보다 보전이나 관리에 힘이 들더라도 일종의 고향이란 그런 것이 아닐까요?
이 문화재가 여기에 온 사연은 간단치만은 않습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15년 경복궁 자리에서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朝鮮物産共進會) (1915.9.11~10.30)가 개최되었습니다. 당시 강제 동원된 관람객은 총 116만 명에 달한다고 합니다. 당시 조선 인구가 1,600만 명 정도로 추산되어 인구 대비 7.2%에 해당했다고 하네요. 이때 전시 경복궁의 작은 건물들은 모두 철거되고 전시 명목으로 전국의 석탑, 고승의 탑비, 승탑 등이 차출되어 옮겨와서 전시물로 사용되었습니다. 일부 유물은 반출되기도 하고 운 좋게 남은 것은 용산박물관이 지어질 때 이전되어 후손들을 맞이합니다.
국립박물관에는 전시되지는 않았지만, 대표적인 이전 문화재 중에는 우리나라 최고의 승탑으로 알려진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탑(국보 101호)이 있습니다.
경복궁에 이전되어 있던 것이 한국전쟁 중 일부 훼손되어 있었는데, 국립문화재연구소 문화제보존센터에서 복원되어 원래 고향인 원주 법천사지로 돌아갈 계획이랍니다. 당초 2021년에 돌아가려고 했으나 승비도 함께 보존 처리한 후 2024년쯤 함께 돌아갈 것이라고 합니다. 늦게나마 제자리를 찾는 결정을 환영하며 다른 유물들도 하루속히 고향의 품에 안기길 기대해 봅니다. 답사는 불편하겠지만 답사의 의미는 더 커지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