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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10. 2022

충주 청룡사지 靑龍寺址

힐링 폐사지 답사


청룡사지는 충북 충주시 소태면에 위치한 고려시대 창건된 절의 터이다. 일제강점기에 최종 폐사된 듯하다.

전승에 따르면 고려시대 어느 노승이 근처를 지나다 공중에서 용 2마리가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땅에 떨어뜨린 여의주를 집어 청계산으로 사라졌는데 용의 꼬리가 사라진 곳에 암자를 짓고 청룡사라고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청룡사는 한글 창제(1443년) 이후 반포(1446)되기 이전에 수많은 불교 경전의 언해 작업이 이루어졌다. 대표적인 것이 1449년 목판 출간된 '석보상절'이다. 그래서 그런지 전승 중에 유독 공부한 사람의 이야기가 많은 것이 눈에 띈다.  현종 때 영의정을 지닌 남인의 영수 허적, 선조 때 의병을 일으킨 조웅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다.

하지만 조선말의 세도가 민대룡 閔大龍 의 이야기에 이르면 씁쓸해진다.  민대감은 소실을 들였는데 아마도 마음에 쏙 들었던 모양이다. 사찰 근처에 소실의 무덤을 쓴 대감은 묘지 근처에 사찰이 있으면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에 돈을 주고 노비(승려라는 이야기도 있다)를 사주하여 사찰에 불을 지르게 한다.  우리는 항상 이런 경우 대가를 치르는 통쾌한 장면을 기대하는데 이 경우가 그러하다.  불 지른 사찰에서 뱀이 쏟아져 나와 한 사람은 놀라 죽고, 나머지 한 사람은 발이 떨어지지 않아 타 죽게 되었다고 한다.  해설사님의 이야기는 아직도 그 소실의 무덤이 있기는 한데, 주변 민대감의 묘지에 제를 지내면 그 해에 일가 중에서 사람이 죽어 나갔다고 한다. 그래서 지금은 돌보는 이 없는 구별하기 힘든 폐묘가 됐다고 한다.

주차장에서 2~3분만 올라가면 유물들이 보인다
야자매트를 깔아 놓은 답사로는 물이끼가 아름답게 피어 있어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다.




위쪽에서부터 보각국사 탑비, 보각국사 탑, 사자 석등 이 있고, 문화재로 지정되지 않은 부도탑, 부재, 탑비가 하나 있다.

이제 보물을 살펴보자



이 장소의 주인공 보각국사는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세운 태조 이성계의 때 국사를 지낸 혼수 混修 (1320~1392) 스님을 지칭한다(또 다른 고려의 보각국사는 일연스님이 있다). 속성은 조 씨이고 자는 무작 無作, 호는 환암 幻庵, 시호가 보각 普覺이다.
어린 시절 골골하던 환암을 보고 걱정하던 어머니는 사주, 운명을 본 모양이다. 결과는 10대에 출가하여 큰 스님이 될 테니 걱정 말라고 나왔다고 한다. 불교시대에 요즘으로 따지면 아이돌이 될 거라는 이야기가 나왔으니 어머니는 안심을 했을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12세에 계송繼松 에게 출가하여 고려 충혜왕 복위 2년(1341)에 승과에 급제한 후 청룡사 근처에 연회암을 짓고 머물렀다고 한다. 공민왕 23년(1374)에 국왕에게 설법하였다고 한다. 우왕 9년(1383)에 국사가 되었다. 송광사 주지를 거쳐 태조 1년에 입적하였다고 한다.
생각하기에는 정권 변동기에 중요한 불교계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던 스님이니 태조 또한 대접을 하며 챙겼을 것으로 판단된다. 안 그래도 처리할 일 많은 혁명의 시대에 불교계 원로까지 적으로 만들 수는 없었을 테니까.

청룡사지를 가야 할 이유는 석조유물 3종 세트가 반경 2m 안에 모여 있기 때문이다.  가성비가 아주 좋은 답사코스다.

1. 보각국사탑비(보물 제658호)
'정혜원융 定慧圓融'이 탑의 이름이다.
혼수의 업적을 기리기 위한 탑비로 조선 태조 3년(1394) 제자인 희달이 왕명을 받아 건립했다고 한다. 글은 권근 權近 (1352~1409)이 짓고 승려 천택이 글씨를 썼다고 한다.



비석 윗부분에 해서체로 쓴 글이 눈에 띄는데 글에 문외한인 나는 중국 명필과도 비교된다는 그 글의 가치를 논할 능력이 없다. 나머지 글은 마모되어 식별하기 어려웠다.
글은 위쪽에 바싹 붙인 것을 보면 처음부터 이수를 올리지 않을 계획이었던 것 같다. 귀퉁이만 자른 귀접이 방식을 채택했다. 국사의 부도탑비로는 좀 없어 보이는데 아름다운 부도탑과 대비된다.

석재의 선택에 정성이 부족했는지 상단을 가로지르는 크랙이 보이고 위아래 부분의 표면이 침식되는 모양이 안타깝다. 비석은 다른 석조유물과는 달리 표면에 정교한 글을 써야 하니 표면을 갈아서 광택을 내야 한다.  보통 사암 같은 입자가 고운 암석을 쓰는 것이 글자를 새기기에 적당하다. 화강암으로 만든 비석은 글을 많이 쓰기가 어려워 글에 비해 그 크기가 커지게 된다.

2. 보각국사탑(국보 제197호)
혼수가 입적한 지 2년 만인 조선 태조 3년(1394)에 건립됐다.
당시 종형 부도탑이 일반적인 상황에서 특이하게 팔각 원당형으로 되어 있다. 조형미가 뛰어나고 몸돌의 배흘림기둥, 지붕의 곡선, 지붕합각마루의 용머리 조각 둥 목조건축물의 특징을 보여준다. 빼어난 작품이다. 
8각형의 높은 지대석 위에 연화문을 양각한 하대석이 있다. 그 위에 북 형태의 중대석이 놓여 있다. 측면에는 코끼리 눈 모양의 무늬가 조각되어 있다.  탑신이 8각이라 풍부한 느낌을 주는데 용이 양각된 기둥이 있고 그 안에는 신장상을 새겨 넣었다. 옥개석 역시 팔각으로 가장자리에 용머리 모양을 장식해 놓았다. 상륜부의 앙화, 보주, 화염보주가 남아있어 완전체를 이룬다.  조선 전기 부도탑의 걸작으로 평가받는다. 내가 보기엔 어설픈 왕릉보다 훨씬 격조 있고 품격 있어 보인다.



3. 보각국사탑 앞 사자석등(보물 제656호)
보통 석등은 사찰에서 대웅전 앞 탑근처에 위치한다. 밤의 분위기를 살리고 행사 시에 위엄을 북돋우는 데 사용된다. 하지만 청룡사지에는 부도탑 앞에 석등이 있다. 아직 이런 경우를 본 적이 없는데 한적한 곳에 위치한 스님이 쉬시는 곳에 번잡스럽지 않을까 모르겠다. 누군가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나중에 알아볼 일이다.
높이 2.2m인 석등은 3단 받침돌 위에 불을 켜는 화사석을 올렸다. 그 위에 비를 막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올렸다.
받침돌로 웅크린 사자를 사용한 것이 특이하다. 화사석은 한 돌로 되어 있는데 네 모서리를 기둥 모양으로 장식했다. 불이 나오는 화사창은 사방으로 뚫린 것이 아니라 부도탑과 그 앞 방향만으로 뚫려 있다. 사각의 지붕돌은 두툼하게 부피감을 주며 경사가 급하게 되어 있다. 추녀의 곡선이 대단히 아름답다. 방사상으로 지붕면을 구분하는 돋을 장식의 귀퉁이에 꽃을 튀어나오게 장식했는데 한쪽이 깨진 것으로 보아 땅에 떨어진 것을 복원한 게 아닌가 생각된다.



야외 석조유물은 시간대에 따라 매우 다른 느낌을 전해준다. 비추는 햇살의 각도도 그렇고 계절의 정취도 매번 다르다. 그래서 한번 가고 두 번 가고 자꾸 가게 된다. 시간의 더께가 쌓인 유물 앞에서 꼬박 며칠을 보내며 고스란히 그 느낌을 접해보고 싶은 욕심이다. 시간에 쫓기는 초보 답사자는 자리를 털고 다음 장소로 떠난다.

마지막으로 홀로 안내소를 지키던 해설사 이야기가 풍성하다.
뱀이 많으니 탕탕거리고 올라갈 것을 권하면서 요즘 뱀이 독이 많이 올라 있으니 아주 조심하라고 당부를 했다.  잔뜩 겁먹고 처음에는 내가 생물 답사를 왔는지 문화유산 답사를 왔는지 헷갈일 정도로 뱀만 찾았다. 하지만 여기선 다행히 뱀을 보진 못했다.
문화재 주변 공공근로로 너무 많은 어르신들이 배치되어 일없이 돈만 받아가는데 이렇게 흥청망청 사용하니 미래 세대가 걱정이라고 넋두리했다. 나도 격하게 고개를 주억거렸다.

답사는 과거와 현재 미래가 만나는 지점이고 시간이다.
우리가 과거 때문에 현재에 존재하듯이 우리는 미래의 기초인 것이다.  우리가 잘해야 한다.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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