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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25. 2022

붉은 벽돌 세계에 사는 우리

성당 건물에 대한 작은 생각


여행을 다니다 보면 종교 건축물을 빼놓을 수 없다. 사찰도 그렇고 성당이 그렇다. ‘한국천주교회통계 2020’에 따르면 전국 성당은 1,767개라고 한다. 천주교회 문화재는 국가등록문화재가 50개, 사적이 8개로 총 58개다. 불교의 총 1,597개에 비하면 작은 숫자다. 천주교가 19세기 말부터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을 보면 당연한 일이다. 어찌 됐든 천주교가 우리의 문화에 들어와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 건축물은 도시 지역의 성당과 그 외 지역의 공소로 나눠 볼 수 있다. 공소는 본당보다 작으며 주임신부가 상주하지 않고 순회하는 구역의 공동체이다. 우리 건축물을 그대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물론 전통 건물과 정면(입구)의 위치가 바뀐다. 도시의 성당은 성당 하면 떠올리는 이미지로 우리 역사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그 이미지는 시대에 따라 달라졌고 앞으로도 달라질 것이다.


용인 고초골 공소, 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 약현성당


우리나라 최초의 성당이라고 하면 서울 중림동 약현성당을 꼽는다. 명동성당이 아니다. 약현성당은 명동성당(1898)이 완공되기 6년 전인 1892년 완공되었다. 1886년 조불 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공식적인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다. 성당은 1887년 5월 부지 매입을 시작하여 1891년 10월 착공하여 1년 만에 완공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 벽돌 성당이다. 사적 제252호다. 당시 사목 분담은 명동성당이 한양도성 내, 약현성당이 한양도성 외를 분담했다고 한다. 서소문 순교지 근처에 자리 잡고 있다. 주보성인은 성모 마리아이다. 결혼식 장소로 인기가 높다.



약현성당은 적벽돌 로마네스크 양식과 고딕 양식의 절충 형식 건물이다. 고도의 기술과 건축비가 많이 드는 고딕 양식으로 짓기에는 당시의 상황이 녹녹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프랑스 신부 코스트(E.G. Coste)가 설계하고 중국인 기술자가 시공했다. 러시아 건축가인 사바틴(A.I.S Sabatin)이 자문했다. 연면적 120평의 장방형이다. 1998년 방화로 전소되었다가 2000년 복원을 마쳤다. 

 길이 32m, 폭 12m의 삼랑식(三廊式)으로 중앙 신자석(네이브, nave)과 양측 통로(아일, aisle)로 구분되어 있다. 천장은 기본적으로 볼트(vault) 구조로 되어 있다. 벽 구조는 적벽돌, 천장은 목구조이며 지붕은 함석이다. 기본적인 공간과 형태에 충실한 아담하면서도 장중한 느낌을 주는 건물이다. 당연히 명동성당과 함께 한국 성당 건축의 교과서 역할을 하고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제2차 바티칸 공의회, by Lothar Wolleh Wikimedia commons


성당 건물은 신도시가 생기면 교구가 분리되면서 새로 건축된다. 최근의 성당은 기존의 전통을 따르기도 하지만 일률적인 성당 양식에서 벗어나서 지어지고도 한다. 이는 교황 요한 23세 ~ 바오로 6세 시기인 1962~1965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역할이 크다. 천주교의 대격변이 이루어진 이 회의에서 정교분리의 원칙, 교황의 위치 재정립 등 혁신적인 결과가 쏟아져 나왔다. 


이 회의에 따라 1965년 1월 1일부터 한국어 미사가 집전되기 시작했고 신∙구교 ‘공동번역 성서’가 나오게 되었다. 성당 건축과 관련해서는 신자의 능동적인 참여 확대, 성당 형태의 자율화, 기능의 사회화가 선언되었다. 또 과거 양식을 탈피하여 건축가의 창조성을 인정해 나가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성당의 건물은 기존 양식을 전승하기도 했지만 천천히 양식의 탈피와 한국화의 길로 들어섰다. 논현동성당(1989), 부산 남천성당(1991). 대구 지산성당(1995), 안동성당(2000), 중곡동성당(2001) 등이 그 사례이다.



최근의 성당, 서판교 성당

분당 서판교의 판교성김대건안드레아성당은 2012년에 준공된 성당이다. 주보성인은 김대건 신부이다. 자세한 정보는 없지만 철근콘크리트 구조에 적벽돌로 외벽을 마감하였고 동판으로 천장을 올린 변형 고딕 양식 건축물이다. 신도시스럽게 복합적인 시설이 포함된 작은 부지에 세워진 건물이다. 우리 문화를 이식한 스테인드글라스가 성스러움을 더한다. 적벽돌의 옛 스러움을 살리고 있고 비취색 천장은 고풍스러움을 더한다. 



벽돌 이야기 그리고 지질학


두 건물의 외형적인 특징에서 가장 알기 쉬운 부분은 적벽돌의 사용이다. 벽돌은 한국산업규격에 따르면 ‘점토, 고령토 등을 주원료로 하여 혼련, 성형, 건조, 소성(불에 굽는 것) 시켜 만든 것으로 주로 바닥 및 벽체의 구성에 사용되는 건축재료’를 의미한다. 적벽돌은 주원료에 산화철을 첨가하여 구울 때 산화소성을 하여 만들어진 벽돌이다. 일본과 중국에서 먼저 적벽돌로 지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자연스럽게 국내에도 소개된 것으로 보인다. 우리나라의 최초 적벽돌 건물은 부산 일본 관리청(1879)으로 알려졌는데 명확한 고증이 되어 있지는 않다. 약현성당의 경우 한강통 연화소에서 제작된 것을 사용했다고 하는데 불확실하다. 청나라와 일본에서 벽돌을 수입하여 주로 사용되었고 1907년에 비로소 호프만 가마가 설치되면서 기계식 벽돌의 생산이 본격화되었다.

수원 화성 장안문, 출처 : 문화재청


벽돌의 색은 첨가재의 종류, 소성시 가마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우리나라의 벽돌과 기와는 검은색을 띤다. 이는 도자기 가마에서 구워서 인데 구울 때 가마의 입구를 밀폐하여 산소의 공급을 차단하면서 굽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면 재료 중의 산소가 모두 소진되고 땔감으로 사용한 목재의 재가 벽돌 등의 표면에 착색되어 검은색을 띠게 된다. 이를 환원소성이라고 한다. 반대로 소성 중에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도록 하면 재료 중의 산화철이 산소를 흡수하여 붉은색을 띠게 된다. 이를 산화소성이라고 한다. 이렇게 소성 방식의 차이가 벽돌 색의 차이, 풍경의 차이를 가져왔던 것이다.


진주 진주층의 붉은 셰일


지질학에서도 똑같은 모습이 보인다. 퇴적암 셰일을 보면 붉은색을 띤 것과 검은색을 띤 것을 볼 수 있다. 전자는 산소가 충분히 공급되던 장소에서 쌓인 것이다. 즉 밀물과 썰물이 교차하던 갯벌 같은 조간대가 대표적이다. 산화 환경이다. 후자는 물이 고여 있고 낙엽 등이 쌓인 호수나 늪, 소택지 등 산소가 부족한 곳에서 쌓인 것이다. 이를 환원 환경이라고 부른다. 산화와 환원은 산소가 풍부한 지구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반응이다. 화성에서 옛 산화의 환경을 찾는 것이 산소의 흔적 그리고 생명체의 존재를 알아내는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유기도 하다.


이제는 예전처럼 적벽돌만으로 건물을 짓지는 않지만 외장재로 가장 많이 선호되는 것이 적벽돌이다. 싸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먼 훗날 후세 지질학자들이 우리가 살던 지금 시대의 지층을 조사하면 많은 적벽돌의 흔적을 발견할 것이다. 그러면 그들은 우리가 산화 환경에서 살던 선조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마치 바다에서 땅으로 처음 올라온 우리의 선조가 그랬듯이 말이다. 아니면 우리는 선조들처럼 아직도 진화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참고문헌


1.     정성희, 2008, 한국 성당건축에 나타난 건축적 특성에 관한 연구, 단국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2.     조홍석, 2005, 한국 근대 적벽돌(赤甓乭) 건축에 관한 연구, 목원대학교 박사학위 논문

3.     조홍석, 김정동, 2010, 근대 적벽돌(赤甓乭) 생산사에 관한 연구, 건축역사연구, 제19권 제6호 P. 99~120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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