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북에서 파주 용미리로 가려면 수도권 제1고속도로를 타게 되는데, 이 길이야말로 도봉산을 제대로 관람할 수 있는 길이기도 하다.
별내 IC를 지나면 왼쪽으로 불암산이 오른쪽으로는 수락산의 바위들이 보이기 시작한다. 소음방지벽 때문에 제대로 볼 수 없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1665m의 불암산 터널을 통과하면, 비로소 도봉산의 동쪽 전경이 느닷없이 나타난다. 이래도 되나 싶게 사정없이 화강암산 전체가 한눈에 들어온다.
파주 지역 지질도 원 안의 지역이 화강암 지역. 출처: 한국지질자원연구원
잘 알려진 바처럼 서울 북쪽의 북한산과 도봉산은 중생대 쥐라기에 관입한 대보화강암으로 만들어져 있다. 암봉들이 밝은 빛을 띠며 멀리서도 선뜻 눈에 띈다. 이 화강암은 북쪽으로는 동두천시, 북동쪽으로는 철원군까지 이어져 있다. 남쪽으로는 서울 남산을 경계로 편마암과 접한다. 물론 강건너의 관악산도 같은 대보화강암이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도 주변이 대보화강암으로 되어 있다. 그래서 조선건국 세력에게 편안했으리라.
말도 탈도 많았던 사패산 터널(4km)을 지나면 화강암은 사라지고 이제부터는 편마암지역에 들어선다.
경기편마암복합체게 속하는 이 편마암은 선캠브리아기에 먼저 생긴 이 지역의 바탕암(기반암)이다. 화강암은 이 편마암지역을 뚫고 지표면으로 올라온 것이다. 암석의 변화에 따른 지형의 변화를 충분히 느낄 만큼 산은 얌잖해지고 골짜기도 깊지 않다. 편마암지역의 산은 대체로 흙위주의 토산이다. 그래서 주로 편마암인 파주에는 공동묘지가 32개소나 된다.
그런데 파주 용미리에 가면 갑자기 넓지 않은 화강암지역인 장지산이 나오는데, 바로 여기에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이 있다.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 ⓒ 전영식
불상의 이름을 붙이는 방법은 간단하다. "지역명 + 사찰명 + 재료 + 부처이름 + 불상의 자세 + 상(像)"이 그것이다. 이 문화재는 지역명 파주를 붙이고 근래 만들어진 사찰인 용암사 명칭 대신 대신 용미리를 붙였다. 석불처럼 보이지만 정확히는 암벽에 새겨서 만든 것이라 마애를 붙이고, 부처를 2명 새겼다 하여 이불, 그리고 서있는 자세여서 입상이라고 명명했다.
용암사 대웅전 마당에서 약간 위쪽으로 올라가서 남서쪽향 절벽에 위치해 있다. 불상의 전체 높이가 17.4m, 얼굴이 2.4m이다. 참고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 18.14m이고, 마징가 Z가 18m이며 광화문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 전체의 높이가 17m이다. 엄청 크다.
화강암 천연암벽을 몸통으로 삼아 선각(線刻)했고, 그 위에 목, 불도(佛頭, 머리), 갓 등을 따로 제작하여 얹었다. 안동 이천동 제비원 미륵석불도 동일한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거대한 불상들은 신체의 비율도 맞지 않고 기형으로 생겨 눈에 걸린다. 둥근 갓(원립)을 쓴 불상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나타내 보이고 있으며 목은 원통형으로 삼도(三道)는 없고 통견(通肩)의 납의(衲衣)는 가운 모양으로 몸을 싸고 있다.
전면에 있는 좌측의 마애불은 우측 불상에 비해 키가 더 크고 둥근 갓을 썼다. 왼손을 어깨높이로, 오른손은 가슴 높이로 들고 그 사이에 연꽃 줄기로 보이는 모양이 새겨져 있다. 꽃이 있는 게 당연한데 철물이라 소실된 듯하다. 여래로서 연꽃 줄기를 들고 있는 경우는 석가모니, 혹은 미륵불인 경우가 많은데, 해당 불상의 명문에 미륵불을 언급하고 있어 미륵으로 추정된다. 불상은 넓은 어깨를 당당하게 벌리고 있어 웅장한 느낌을 준다. 통견(通肩)의 착의를 하고 있다. 가슴 부분에는 속의 가사를 묶은 리본 모양의 띠 매듭이 있다. 그 아래로 왼쪽 어깨로 쏠려 올라가는 듯한 ‘U’ 자형 옷 주름이 반복적으로 표현되며 흘러내리고 있는데 바위 맨 아래까지 이어진다. 좌우로는 양팔에서 흘러내린 소맷자락 주름이 허리 아래에까지 늘어져 있다.
우측의 불상은 좌측의 마애불보다 키가 조금 작고 좌측 불상 뒤에 다소곳이 서있는 모양새이지만, 원근법과 상관없이 얼굴이 더 크며 네모난 갓을 쓰고 합장하고 있는 모습이다. 바위의 자연적 상태 때문에 몸은 약간 옆으로 튼 모습이지만, 얼굴은 좌측 마애불과 같이 정면을 바라보고 있다. 마치 두 불상이 어깨를 맞대고 있는 듯한 자세가 암석의 모습을 잘 살렸다. 착의법이나 옷자락의 흐름은 좌측 마애불과 동일한데 바위의 폭이 좁기 때문에 바위 오른쪽까지 옷자락을 새겼다. 전설에 따르면 좌측 연꽃을 든 마애불은 남성, 합장한 마애불은 여성이라고 한다.
한편, 이 마애불에는 고려 때의 조성 연기가 다음과 같이 전해진다. 고려 선종(제13대 왕, 재위 1083~1094)이 자식이 없어 원신궁주(元信宮主)를 제3 비로 맞이했는데, 역시 후사가 없었다. 그러던 중 원신궁주의 꿈에 두 도승(道僧)이 나타나 말하기를, ‘우리는 장지산(長芝山) 남쪽 기슭에 있는 바위틈에 사는데 지금 매우 시장하다’하였다. 다음날 사람을 보내 알아보니 장지산 아래에 두 개의 큰 바위가 나란히 서 있다고 하였다. 이상하게 여긴 왕은 이 바위에 꿈속의 두 도승을 새기게 하고는 절을 지었는데, 마침 그 해에 왕자 한산후(漢山候)가 탄생하였다는 것이다.
그 후의 역사 이야기는 드라마에서도 잘 나오는데, 선종이 아들 헌종에게 왕위를 물려줬으나 병약하여 결국 선종의 둘째 동생인 숙종이 되는 계림공에게 모함을 받아 한산후는 원신궁주와 함께 유배되고 왕위계승전쟁에서 밀려났다.
기존에는 이 설화를 고려해 이들 마애불의 제작 시기를 고려 전기인 11세기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1995년 오른쪽 불상 허벅지 근처 암벽 면에서 ‘성화(成化) 7년’의 명문이 발견됨에 따라 조선 초기의 작품일 가능성이 새롭게 제시되었다. 즉 ‘성화 7년’은 1471년(성종 2)에 해당하는데, 이전에는 이 명문을 마애불을 제작할 때 새겨 넣은 것이 아니라 후대인 조선 초기에 기록한 것으로 이해하였었다.
그러나 1465년(세조 11)에 세조와 정희왕후의 모습을 미륵불로 조각한 것이라는 설이 제기되었다. 아직 확실하게 밝혀지진 않았다. 명문에 등장하는 추모 대상인 세조 및 그와 연관된 인물들의 능묘(한명회의 두 딸 묘지인 공릉, 순릉)가 파주에 많이 분포하고 있어서 마애불을 새롭게 조성할만한 의미가 충분하다는 점이 지적되었다. 세조와 측근들은 단종을 폐하응 거사를 공모했고 끝내 단종과 그 주변 사람들을 모조리 제거한 사람들이다. 성종은 세조의 손자이다. 아울러 연꽃을 든 마애불이 쓴 둥근 갓은 고려 말~조선 초에 관모로 사용된 것이어서 이들 마애불은 조선 초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논쟁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데 유래를 전하는 두 이야기가 매우 비슷한 게 신기하다. 게다가 왕위를 찬탈한 사람들의 후손도 그리 복이 많지는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의 머리 부분 후면 모습, ⓒ 전영식
천연암벽의 자연미를 불상 조각에 적절히 활용해 미적 수준을 높인 작품이다. 바위가 자연적으로 튀어나온 부분을 한 마애불에서는 연꽃 줄기를 잡기 위해 들어 올린 팔의 모습으로 묘사하였고, 다른 마애불에서는 합장한 팔로 응용하였다. 옷자락의 흐름 역시 바위와 절묘한 조화를 이루어 조각가의 탁월한 선택이 돋보인다. 마치 일부러 조각한 것이 아니라, 원래 바위 속에 있었던 부처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그것을 더욱 잘 보이게 하려고 표시를 해놓은 듯 모든 것이 자연스럽다.
주변의 화강암 암석
마애이불입상에는 전형적인 화강암의 미풍화조직인 앙파처럼 껍질이 떨어져 나가는 구상절리가 보이고 마애불의 본체에는 수직절리, 수평절리도 보인다. 마애불의 절리는 제작당시부터 있었을 것인데, 의뢰받은 석공이 고심 끝에 이를 이용하여 2개의 불상으로 나눠서 제작한 것으로 추정된다. 즉 불상이 2개인 이유는 종교적인 이유보다는 현장의 지질학적인 요소가 더 크게 작용했으리라는 게 나의 생각이다. 우측 불상의 어깨 하단 부분에는 타포니 현상도 보인다. 모두 지질학의 흔적이다.
좌측 마애불 좌하 측에 보이는 구상절리가 보이는 암석, ⓒ 전영식
우측 마애불의 어깨 아래 부분의 타포니 현상, ⓒ 전영식
두릅나무 뒤로 화강암 암석들이 떨어진 것이 보인다 ⓒ 전영식
경주의 남산에 가면 이런 모습이 잘 보이는데, 마애불이나 석불이 있는 모셔져 있는 주변 산기슭은 살펴보면, 위 사진처럼 큼직한 바위의 낙석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이런 낙석이 있는 곳에는 적당한 위치에 마애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자연스럽게 하게 된다. 아직 발견되지 못한 부처님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란 기대를 해본다.
안타깝게도 마애이불입상이 있는 산 너머에는 삼표산업이 1994년부터 운영하는 '광탄 채석단지'가 있다. 화강암이 있는 것을 귀신같이 알아챈 업자들이 산을 파먹고 있다. 이런 식이면 우리는 앞으로 화강암절벽을 모두 잃어버리고 말 것이고, 후손에게 전한 우리의 미술유물들을 남길 방법이 없어질 것이다. 참고로 안동 제비원 미륵석불 근처 300m에도 골재 채취장이 있다.
용미리 마애이불입상과 광탄 채석단지(화살표)의 위성사진, 출처: 네이버 지도
전자기록, 책 등이 있다지만, 기록의 내구성면에서는 뭐니 뭐니 해도 암석에 새기는 것을 따라갈 수 없다. 류츠신의 SF 소설 <삼체>에서도 사라지는 인류는 결국 암석에 기록을 새기는 것을 선택한다.
사람도 그렇지만 쓸만한 암석은 드물고 그 암석이 모두 훌륭하게 쓰이는 것은 아니다. 우리 선조의 암석에 대한 탁월한 선택이 오늘 우리가 장엄한 예술품을 소유하고 감상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