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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영식 Oct 06. 2022

돌을 다루는 우리 그림과 서양 그림

화가의 시선 - 윤두서 vs. 구스타프 쿠르베


우리 옛 그림 중 실제 생활의 모습이 소재가 되는 때는 조선 후기가 되어 서다. 관념적인 산수화나 매난국죽 등의 소품에서 벗어나 우리의 생활이 그림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이는 서양 그림에서도 마찬가지로 기독교의 이야기를 주로 그리던 그림은 일반인이 주인공이 되는 시대로 들어서게 된다. 이러한 흐름을 잘 반영한 두 그림을 비교해 보면 색다른 느낌이 들 수 있지 않을까?

이런저런 이유로 해남을 방문하게 되면 윤 씨를 많이 만나게 된다. 윤석열 대통령이 당선되면서 윤 씨에 대해 알아보니 우리나라 성씨 중에 8위를 차지하는 큰 성씨였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따르면 윤 씨는 102만 명에 달하는데, 그중 파평 윤 씨가 75.5%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다음으로 많은 본관이 해남인데 그래서 해남에 가면 윤 씨를 자주 보게 되는 듯하다.

석공공석도, 윤두서

해남 윤 씨 중에 오늘 우리가 알아볼 <석공공석도>를 그린 이는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 1668~1715)이다. 고산 윤선도의 증손자이자 다산 정약용의 외증조부이다. 그의 외갓집이 푸른 비 내리는 집 ‘녹우당(綠雨堂)’이다. 해남군 현산면에 있는 윤두서 고택도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공재는 겸재(謙齋) 정선, 현재(玄齋) 심사정과 더불어 조선 후기 삼재(三齋)로 일컬어진 문인 화가이다(혹자는 공재 대신 관아재(觀我齋) 조영석을 삼재에 넣기도 한다). 26세에 진사시에 합격했으나 집안이 속한 남인 세력이 당쟁에서 밀려나면서 벼슬에 나가는 것을 포기하고 학문과 서화에만 몰두했다. 1712년 고향인 해남으로 낙향한 뒤 4년 만인 1715년 48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그림은 <자화상>이 유명하며 <채애도>, <선차도>, <백마도> 등 많은 작품이 있다.

<석공공석도>는 영∙정조 시절 어의를 지냈던 서화 수집가 석농(石農) 김광국(金光國)의 화첩 <석농화원>에 포함되어 있다. 석농은 그림 왼편에 쓴 제화 글에서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右石工攻石圖乃恭齋戱墨而 俗所謂俗畵也
頗得形似 視諸觀我齋猶遜一籌
오른쪽은 ‘석공공석도’로서 곧 공재(恭齋)가 노닌 묵(墨)인데, 세상에서 흔히 말하기를 속화라 한다.
자못 형사를 얻었으나 모두 관아재에 비한다면 오히려 한 수 아래라 하겠다.


석농은 관아재 조영석(1686~1761)의 그림을 더 높게 보고 있지만, 18살이나 나이 차이가 나는 작가의 그림을 같이 놓고 볼 수는 없는 것이다. 마치 'BTS'가 ‘서태지와 아이들’보다 낫다고 이야기하는 모양새다. 조선 화가에는 삼재 말고도 삼원이 있는데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오원 장승업을 일컫는다. 그들의 그림은 다음에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참고로 <석농화원>은 조선 후기 최고의 회화 컬렉션으로 일컬어진다. 우리나라 화가만도 공민왕에서부터 안견, 김홍도, 윤두서 등 101명에 이른다. 지금은 전해지지 않는다. 2013년 <석농화원>의 육필본이 고서 경매에 나와 미술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조선 시대 문인 유한준(1732~1811)은 석농의 소장품을 평하면서 “알게 되면 참으로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면 모으게 되니”라고 이야기했다. 이 문구는 훗날 유홍준에 의해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면 보이나니”로 인용되어 유명해졌다.


윤두서, <석공공석도 石工攻石圖>, 18세기 초, 모시에 먹, 22.9x17.7cm, 학고재 소장


이 그림을 이야기할 때 꼭 나오는 이야기는 똑같은 그림이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는 것이다. 무심히 본다면 구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유사하다. 이 그림은 담졸(澹拙) 강희언(1710~1784)이 그린 <돌깨기>인데 역시 김광국의 다른 화첩인 <화원별집>에 실려 있다. 제목에 ‘담졸학공재석공공석도(澹拙學恭齋石工攻石圖)’라고 적혀 있어 강희언이 윤두서의 그림을 본떠 그린 것으로 보고 있다.

그려진 시기가 불분명한 이 그림에는 두 석공이 바위를 절단하는 장면을 스냅사진 찍듯이 묘사하고 있다. 정을 잡고 있는 노인은 돌이 튈까 봐 고개를 반대 방향으로 돌리고 있고 조수인 듯한 젊은 석공은 줄에 달린 쇳덩어리를 정에 내리치려고 입을 꾹 다물고 힘을 쓰고 있다. 야구에서 타자가 공을 치는 순간 무게 중심을 이동하듯이 왼발 쪽으로 무게를 싣고 있고 등에는 힘을 쓰는 근육의 움직임이 잘 포착되어 있다. 잠시 후 경쾌하게 탕 소리가 날듯하다.

석공이 깔고 앉은 바위는 덩어리가 크고 맨발로 올라서도 될 정도로 표면이 평탄하다. 바위에 대어 있는 정을 따라 점들이 일렬로 그려져 있는데 이는 암석을 절단하기 위한 쐐기 구멍으로 보인다. 점들을 연결하는 방향으로 암석을 절단될 것이다.

화성암인 화강암은 암석 자체에 엽리(변성암, 퇴적암 등에서 나타나는 반복되는 면 구조)가 없기 때문에 절단할 때 방향을 잡아줘야 한다. 일렬로 이어진 쐐기 구멍이 그 역할을 하게 된다. 공재의 그림에서는 아마도 누군가의 비석이나 석물에 쓰일 신선한(지질학에서는 풍화되지 않은 돌을 신선하다고 한다) 화강암을 얻기 위한 작업 순간이었을 것이다.

쐐기 구멍의 간격은 어떤 쐐기를 쓰느냐에 따라 달라지는데, 나무쐐기는 홈이 크고 간격이 좁고 철 쐐기는 홈이 좁고 간격이 넓다. 나무쐐기는 작업성이 좋지 않기 때문에 철의 사용이 시작된 이후에는 철 쐐기를 주로 사용하였다. 답사나 조사를 다니다 보면 의외로 쐐기 구멍을 자주 보게 된다. 성공한 석공의 작업은 쐐기 구멍을 남기지 않는다. 돌을 얻어갔기 때문이다. 따라서 실패하거나 포기한 경우에만 쐐기 구멍이 남는다. 저자의 생각에는 나무쐐기의 경우, 원하는 시간에 바위를 자르기 어렵기 때문에 포기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래서 더욱 흔적만 남기는 경우가 많았으리라 생각된다. 쐐기 구멍을 보면 바위 위에서 작업하던 석공의 모습이 오버랩된다.

이 그림이 의미를 지니는 것은 기존의 문인화가 중국의 화본을 따라 그리는 형태가 대부분이었으나 공재의 그림에서는 비로소 일반인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했기 때문이다. 물론 공재의 그림에서 중국 화본의 영향을 완전히 탈피한 것은 아니지만 분명히 진일보하여 우리의 모습이 그림의 주인공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경주 남산의 쐐기 자국


돌 깨는 사람들, 귀스타프 쿠베르

미술 관련 서적에서 공재의 <석공공석도>를 서양화가의 작품과 비교하는 내용이 종종 소개된다. 이때 이야기하는 그림이 귀스타프 쿠르베(Gustave Courbet, 1819~1877)의 <돌 깨는 사람들>이다. 공재보다 대략 100년 후의 화가인데, 두 사람이 돌을 깨는 장면을 그려 많이 비교된다. 구성원도 젊은이와 노인으로 비슷하다.

귀스타프 쿠르베는 처음에는 법학을 공부하였지만 21세에 법학을 포기하고 그림에 전념하게 된다. 1850년을 즈음하여 사실주의 색채를 띤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최초의 모더니즘 운동인 사실주의(realism)니 대표주자로 인정받고 있다. “천사를 실제로 본 적이 없기 때문에 그릴 수 없다”라고 말한 일화는 유명하다. 조용히 그림만 그리던 화가는 아니었고 다양한 사회활동을 하였다. 신화, 과거에서 벗어나 현재의 일상을 왜곡 없이 그리려 했다는 점에서 공재와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오르낭의 매장>, <안녕하세요 쿠르베씨>, <세상의 기원>, <아틀리에> 등의 작품이 있다. 58세에 사망했다.


구스타프 쿠르베, <돌 깨는 사람들 The Stonebreakers>, 1849, 캔버스에 유화, 190x300cm, 게맬데 갤러리(파괴됨)


이 그림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오르낭의 매장>을 그리기 전해에 그린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당시 쿠르베는 고향인 오르낭(Ornans)에 머무르며 다양한 사람을 그렸다고 한다. 따라서 이 그림의 배경도 오르낭일 것으로 생각된다. 이 그림은 1945년 2월 독일군이 드레스덴 인근으로 옮기던 중 폭격에 의해 소실됐다.

이 그림은 대형 그림이다. 세로가 190cm로 일반인 키보다 크고 가로는 3m에 이른다. 그림의 제목처럼 바위가 아니라 암석을 잘게 쪼개고 이를 운반하는 순간의 그림이다. 인물이 중심이 아니라 작업이 그림의 중심이다. 오른쪽의 등을 보인 노인은 일단의 돌을 두 손으로 쥔 망치로 잘게 부수고 있다. 왼편의 찢어진 옷을 입은 소년을 그것을 바구니에 담아 운반하려 하고 있다. 이 일은 부수는 일보다 운반하는 일이 중요한 반복되고 고된 일로 보인다.

그림에 나오는 인물들의 궁색한 옷차림에서 가난한 사람들의 일상을 표현했다고 해석된다. 당시 쿠르베가 그린 일련의 그림에서 일반인들의 생활을 그린 작품이 많은 것으로 볼 때, 가난함을 강조하는 것은 아니고 그림의 주제에 이름 없는 일반인의 생활을 넣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즉 리얼리즘이 반영된 그림이다.


프랑스 오르낭 지역의 석회암 절벽, 출처:구글 로드뷰


망치의 크기가 작은 것으로 보아 단단한 암석은 아니고 쉽게 부서지는 퇴적암 종류인 듯하다. 축대나 건축용 자재로 사용하기에는 너무 작아 보인다. 아마도 웅덩이나 도로에 사용하는 석재로 쓰이는 것이 아닐까 싶다. 그림의 오른쪽 상부 구석에 하얗게 석회암 절벽이 그려져 있다. 오르낭 지역은 위의 사진에도 나타나듯 석회암 지역으로 <오르낭의 매장>의 배경에도 석회암 절벽이 보인다.

암석의 종류에 따라 얻는 방법이 다르고 용도에 따라 가공하는 방법도 다르다. 두 그림은 정형화되어 있던 고전의 시대에서 사실주의의 시대로 넘어오는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소재만큼이나 비슷하다고 볼 수 있다. 이렇게 그림을 한발 더 나아가 보게 되면 이전에는 못 느끼던 색다른 느낌이 오게 된다.

참고문헌

1.      유홍준, 김채식, 김광국의 석농화원, 2015, 눌와
2.      유홍준, 명작순례, 2013, 눌와
3.      이성낙, 초상화, 그려진 선비정신, 2018, 눌와
4.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논산 목조각장 보령석장, 2019, 민속원

전영식 과학커뮤니케이터, 이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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