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러닝의 기록
토요일 아침. 오늘은 내가 올해 목표로 했던 동화구연대회 본선 무대에 오르는 날이다. 한때 성우를 꿈꾸었을 정도로 내 목소리로 무언가를 읽어주고 전해주는 걸 좋아했다. 딸을 낳고 보니 동화책을 열심히 읽어주게 됐고, 나만의 읽기 스킬도 쌓았던 것 같다. 이 정도면 동화구연가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에 대회를 알아보기 시작했다. 이 나이에 무언가에 도전한다는 게 낯설었다. 감사하게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크다는 대회의 본선에 오를 수 있었다.
대회는 오후였다. 막상 무대에 오르려니 오전부터 생각보다 긴장됐다. 나는 생방송만 20년 한 사람이다. 수만 명 앞에서 사회를 볼 때도 떨린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동화구연이 뭐라고. 4분가량 말하는 게 무엇이 그리 떨린다고.' 싶었지만, 그래도 심장은 내 뜻대로 되지 않았다. 새로운 긴장에 몸이 반응한 모양이다. 낯선 긴장이 당황스럽기도 했지만 그것대로 받아들이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나는 오랜 기간 동굴에 갇혀 있었다. 이유를 말하자면야 지면이 모자랄 정도로 할 말이 많지만, 이제 막 알을 깨고 나오는 시기인 듯하여 긴 얘기는 일단 묻어두려 한다. 동화구연대회는 내가 길고 어두운 동굴에서 나오기 위한 중요한 동기부여가 된 것은 분명하다.
아침부터 이상하게 몸이 붕- 떴다. 아마도 긴장 탓이리라. 아이를 학원에 데려다주고 바로 경의선 숲길로 향했다. 달려서라도 마음을 가라앉혀야 할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그저 달렸다. 동화구연을 연습한 녹음을 듣고 또 들으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했다. 바쁘다는 핑계로 원고를 잘 외우지 못했기에, 이 시간이 더욱 소중했다.
슬로 조깅을 한 덕분에 숨이 차지는 않았지만, 허벅지가 제법 묵직해졌다. 뻐근한 느낌을 즐기며 걸음을 떼다 보니 붕 뜬 마음은 사라지고 단단한 땅에 붙어 움직이는 느낌을 받았다. 그래, 이렇게 차분히 한 발씩 나아가면 되지.
대회장에 갔다. 동화구연대회 성인부에는 성우지방생, 배우지망생들도 많다고 한다. 내가 제일 연장자겠거니 싶었는데 웬 걸! 머리가 희끗하신 선생님들도 많이 보였다. 새벽 4시에 일어나 지방에서 KTX를 타고 올라오신 선생님도 있었고, 온 가족이 총출동해 할머니의 도전을 응원하는 집안도 있었다. 이곳은 경쟁의 장이 아니라 각자의 용기가 모인 작은 축제처럼 느껴졌다.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도전에 나이가 중요한가?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나는 이 대회에서 수상하지 못한다 해도 내년에 또 도전할 수 있겠구나. 내면에 평화가 찾아왔다.
드디어 내 순서가 왔다. 기다리는 순간, 마치 20년 전 방송사 면접을 보는 것처럼 심장이 떨려왔다. 차분히 심호흡을 해봤다. 이제 숱하게 이런 자리에 있어야 할 딸을 생각하며 내가 당당히 임하는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짐했다. 문이 열리고, 환한 빛을 따라 씩씩하게 한 발씩 나아갔다. 스스로가 대견하고 멋지게 느껴지자 웃음이 나왔다. 그동안 외운 대로 즐기며 동화를 구연했다. 아쉽게도 중간에 한두 번의 실수는 있었지만, 뭐 그럴 수도 있지. 끝까지 내용을 잊지 않고 차분히 마쳤다. 실수 때문에 장려상이라도 타면 정말 좋겠다는 마음으로 결과를 기다렸다.
결과는? 무려 금상이라는 큰 상을 받게 됐다. 객석에서 나를 바라보는 딸의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엄마를 응원하는 간절한 눈빛, 마치 자기가 상을 받은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펄쩍펄쩍 뛰며 물개 박수를 치던 우리 딸의 모습이 눈에 확대돼 보였다. 울컥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엄마가 새로운 도전을 한다는 걸 보여주고 싶은 마음에 데려왔는데, 내가 바라던 대로 아이는 내 기대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깨달은 것 같다. 오늘 일을 일기로 쓰겠다며 하루종일 종알거리고 주위에 자랑하기 바쁘다.
오늘 나의 모습은 어제보다 더 나은 사람이었으리라 확신한다. 운동을 전혀 하지 않던 이가 37분을 달리고, 하루를 준비한 것도 기특하고, 40대가 넘었다고 자리에 앉아있는 이가 아니라, 떨리더라도 새롭게 도전을 이어가는 멋진 엄마가 될 수 있었던 것도 대견하다. 이 정도면 아이에게 부끄럽지 않은 하루를 보낸 것 맞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