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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Jan 20. 2023

조약돌, 어디까지 구워봤니?

할머니의 손수건

"할머니, 빨리. 나 추워." 

"오야. 옛다."


후~하얀 입김이 뻗어나갔다가 순식간에 흩어집니다. 잠시 불꽃같은 입김을 내뿜는 공룡이 되어 봅니다. 그 사이 할머니는 밤새 지핀 아궁이를 뒤적여 조약돌 몇 알을 골라냅니다. 투박하고 거친 손으로 꾸깃한 손수건을 곱게 펴 밤새 뜨겁게 달구어진 조약돌을 한 움큼 담습니다. 혹시라도 불같은 조약돌이 매듭 틈으로 빠져나오지 않게 몇 번이고 힘껏 동여맵니다. 행여나 손녀가 데이지는 않을까, 알록달록한 꽃무늬 손수건을 한 장 더 꺼내 살포시 감쌉니다. 학교가는 길, 추위를 달래줄 저만의 조약돌 손난로입니다. 


눈이 오는 날이면 온 세상이 겨울왕국이었습니다. 눈이 한 번 오면 무릎까지 잠기기 일쑤였습니다. 내복 입고 투툼한 바지에 털옷까지 겹겹이 껴입어도, 속살을 파고드는 추위에는 장사가 없었습니다. 해마다 찾아오는 폭설이고, 매일같이 반복되는 강추위지만, 아무리 겪어도 익숙해지지 않더라고요. 


약속된 시간. 꼬마들이 마을 어귀에 옹기종기 모였습니다. 등교 크루입니다. 전쟁터에 나가는 군인이 총알을 챙기듯, 아이들은 저마다의 손난로를 챙겨 왔습니다. 집에서 학교까지는 걸어서 한 시간 남짓이 걸렸습니다. 얕은 언덕 하나, 산 하나를 지나야 학교가 나왔으니까요. 산길을 걷는 꼬마들에게 조약돌은 작지만 강력했습니다. 허리춤부터 온기가 퍼지기 시작하면, 움츠려 들었던 어깨도 펴지고, 발걸음도 더 가벼워졌거든요. 조약돌 매직이랄까요. 걸음걸이에 맞춰 주머니 속에서 조약돌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도 좋았습니다. 학교에 도착할 즈음, 식어버린 조약돌을 툭툭 털어 자연으로 돌려보내면, 한겨울 아침 숙제가 끝난 셈입니다. 


자연친화적인 손난로가 부끄럽던 순간도 있었습니다. 육지에 사는 사촌이 쓰던 버튼식 손난로를 만났던 순간입니다. 동전 같은 똑딱이 하나만 눌러주면 순식간에 발열체로 변해버리는 그 손난로를 기억하시나요? (기억하신다면 저와 같은 세대입니다. 저 60년대생 아닙니다.) 신문물이란 게 이런 거구나!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하며, 차마 '나는 조약돌을 구워서 다녔다', 말을 못 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그때는 제가 촌스럽다고 생각했던 모양입니다.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할머니의 손난로는 너무나 소중하고 아릿한 추억이네요. 촌스럽기는커녕, '힙' 합니다. 조약돌 손난로. 어감이 참 예쁘죠? 몽글몽글한 감성도 피어오르는 듯합니다.


이제는 어느 누가 저를 위해 아궁이에 조약돌을 구울까요. 할머니는 매일같이 밭에 나가 이미 굽은 허리를 잔뜩 숙이셨을 겁니다. 너무 크지도, 작지도 않은 은행알 같은 조약돌을 고르고 고르셨을테지요. 눈이 오는 날, 하루도 거르지 않으셨습니다. 아궁이 불이 꺼질세라, 밤새 불을 뒤집으셨을테고요. 손녀를 사랑하는 마음이 이렇게 크고 따뜻했구나를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나서야, 어른이 되고 나서야 깨닫습니다. 


 이 경험은 제가 면접볼 때 요긴히 써먹었습니다. 추운 겨울 저를 지켜주었던 할머니의 마음처럼, 가슴이 시린 사람들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조약돌같은 아나운서가 되고 싶다고 했었죠. 이번 설에는 강력한 한파가 찾아온다고 합니다. 폭설도 내리고, 강풍까지 분대요. 뉴스에서 한파 소식을 전할 때마다 주머니 속에 퍼지던 할머니의 온기를 떠올립니다. 이번 명절은 모두에게 조약돌 손난로 같은 따뜻함이 함께하길 바라봅니다. 


다음 글은 하굣길입니다. 꼬마들은 저마다 가방 속에 이걸 챙겼습니다. 역시 고기도 먹어본 사람이 잘 먹는다고, 오빠들의 등굣길 노하우는 역시 남달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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