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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Jan 21. 2023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얻어맞기 전까지는."

그래도 할 건 해야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칠흑 같은 어둠이 지나고 아침이 찾아왔습니다. 끼이익- 성애가 잔뜩 낀 창문을 여니, 밤사이 산과 논과 들에는 눈이 복스럽게도 내려앉았네요. 호기를 놓칠 수 없는 꼬마들은 교과서는 안 챙겨도 가방 속에 비닐만은 꼭 욱여넣습니다. (교과서는 학교 사물함에 두는 게 90년대에도 '국룰') '쓰봉(쓰레기 봉지)'으로 통하는 검은 봉지부터 비료포대까지 다양합니다. 여기서 연식이 드러납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검은 봉지는 저학년 동생들, 비료포대는 고학년 오빠들의 초이스입니다. 하굣길을 위한 큰그림을 그리는 거죠. 


"누구나 그럴싸한 계획은 있다. 얻어맞기 전까지는. (Everybody has a plan until they get punched in the mouth.)" 복싱계의 전설, 마이크 타이슨(Mike Tyson)이 경고했더랬죠. 1학년 꼬맹이들은 모릅니다. 한없이 폭신할 것만 같은 두툼한 솜사탕 밑에는 엉치뼈를 부서뜨릴만한 트랩이 숨겨져 있다는 것을요. 비바람에 찢긴 나뭇가지들, 저마다 개성을 드러내는 울퉁불퉁한 돌멩이들, 미처 썩지 못한 솔방울까지. 엄마 품 같은 흙길은 모든 걸 품은 채로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그리고 그 위로 아이들을 유혹하는 순백색의 눈꽃 비단길이 내리깔린 것입니다. 나에게 오라, 손짓하는 순백색의 방앗간을 어느 참새가 그냥 지난단 말입니까.


하굣길의 눈썰매는 하루의 클라이맥스입니다. 눈길은 형님·동생을 차별하지 않고 공평하게 대했습니다. 미끄럼 한 번에도 거친 속살을 드러내곤 했는데, 엉덩이만 간신히 걸치는 검은 봉지를 챙겨 왔던 애송이들은 세상의 쓴 맛을 그대로 느껴야만 했습니다. 뾰족한 돌멩이에 꼬리뼈라도 치이는 날에는 몇 날 며칠을 끙끙 앓았습니다. 알짜는 역시 비료포대였습니다. 웬만한 나뭇가지도, 엉치뼈 정도는 우스운 뾰족한 돌멩이도 여간해서는 포대를 뚫지 못했습니다. 끼야~호! 형님들의 두툼한 환호성은 산길을 굽이굽이 돌고 돌아 메아리치며 추운 겨울을 따뜻한 추억으로 장식해 주었습니다. 


인류애도 존재했습니다. 형님들은 장비를 잃은 가여운 동생들에게 학교 앞 문방구에서 박스 하나를 얻어주곤 했죠. '오다 주었다'의 실사판입니다. 그렇다고 본인들의 비료포대를 대여해주지는 않았습니다. 종이박스가 경차라면 비료포대는 고급세단이었달까요. 두툼하면서도 날렵했으며 미끄럽기까지 했던 비료포대가 어찌나 부러웠던지요. 어른들을 졸라 비료포대 하나 얻어 눈썰매를 타던 날, 그 상쾌하고 짜릿하던 쾌감을 잊지 못합니다. 칼바람에 부서지던 머리카락, 볼을 스치는 날카로운 칼날 같던 바람결, 단전에서 올라오는 뜨끈한 열기, 목덜미로 흐르는 이슬 같은 땀방울.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들이켜는 느낌이 이럴까요? 세상에, 비료포대 타려고 학교 가는 날을 기다릴 정도였으니 더 이상 말해 뭐해.


돌이켜보면 참으로 눈이 부신 순간들이었습니다. 씨앗들이 숨 죽이며 봄을 기다리던 겨우내, 드넓은 들판은 우리들의 소유였고, 언덕길은 우리들의 축제였습니다. "뽀. 드. 득. 뽀드, 득."  조심스럽게 첫 발자국을 남기던 발걸음은 이내 "뽀득, 뽀득" 잰걸음이 되고, "뽁, 뽁, 뽁, 뽁" 뜀박질이 되었습니다. 아무도 걷지 않은 낯선 길이 반가웠던 아이들. 그때 그 시절엔 새로운 것이 전혀 두렵지 않았습니다. 혹시 미국의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도 이런 경험을 했던 건 아닐까요?



"그날 아침 두 길은 똑같이 놓여 있었고

낙엽 위로는 아무런 발자국도 없었습니다.

아, 나는 한쪽 길은 훗날을 위해 남겨놓았습니다.

길이란 이어져 있어 계속 가야만 한다는 걸 알기에 다시 돌아올 수 없을 거라 여기면서,

오랜 시간이 지난 후 어디에선가 한숨지으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다고.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다고."


-로버트 프로스트(Robert Frost), <가지 않은 길> 中



다른 사람이 아직 가지 않은 길이라고 해서 주저하지 마세요. 인적 없는 눈밭을 향해 한 발 한 달 조심스레 내딛는 당신을 응원합니다. 마구 뛰어도 보고 어지럽혀 보기도 하고 두툼한 비료포대 깔고 눈썰매도 타십시오. 물론 누구나 애송이였으니까 처음엔 아프기는 아플 겁니다. 얻어맞고 며칠 앓아눕기도 할 테죠. 그래도 세상은 변하지 않습니다. 오로지 당신이 도전을 즐기는 사람으로 변해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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