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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Jan 22. 2023

"애가 탈북자인가 봐요?"

내 누군지 아니?


"저... 실례지만, 애가 탈북자인가 봐요?"

"..."

동공에는 지진이 오고 충격 속에 입만 벙긋거리며 말을 잇지 못하던 9살의 어린 제 모습이 뇌리를 스칩니다. 방학을 맞아 서울 고모네로 향하던 택시 안에서 들었던 말입니다. 90년대 초반에만 해도 탈북자는 흔치 않았습니다. 택시기사님은 낯설면서도 신기한 듯한 제 억양에 호기심을 참지 못하셨던 모양입니다. 40년 인생 중에서 제가 들었던 가장 충격적인 발언 TOP3안에 듭니다. 앞으로 남은 60년 인생에서도 계속 TOP3 안에 들 것 같습니다. 


'탈북자라니... 탈. 북. 자. 라니!!!' 

학교에서 반공사상을 배우고, 주기적으로 사이렌이 울리면 창문을 뛰어넘어 방공호로 뛰어 들어가는 대피훈련을 했던 제게, 고등학교 언니, 오빠들이 1년에 한 번 본인들의 이름이 적힌 군복을 입고, 총을 들고 유격훈련을 받는 모습을 보았던 제게, 동네 어귀마다 군 초소가 있어 학교를 오며 가며 군인 아저씨들에게 건빵과 별사탕을 얻어먹었던 제게, 수시로 훈련 나가는 군용 트럭과 탱크를 보며 살았던 제게, 탈북자라는 오해는 정말 큰 충격이었습니다. 정말로 저와는 거리가 먼 단어라고 생각했거든요. 


'내 억양이 문제였구나.' 

충격을 수습하고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니, 이해하려 노력했습니다.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 하잖아요. 경상도와 전라도가 억양과 사투리가 다르듯이, 백령도도 특유의 억양과 사투리가 있습니다. 대부분의 어른들이 표준어처럼 사투리를 쓰시니, 제가 미처 깨치지 못한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쓸 재간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태어나고 자랐던 백령도는 북한과 정말 가까웠어요. 어느 정도로 가깝냐면, 미세먼지 없이 맑은 날에는 바다 건너 저 멀리서 농사일을 하는 북한 사람들의 움직임을 볼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실제로 배를 타고 탈북자가 넘어왔던 기억도 있습니다. 어른들 사이에서 쉬쉬하며 소문으로만 돌던 이야기가 한참 뒤 TV 뉴스에 나오더군요. 배를 타고 백령도를 통해 넘어왔다고요. 참 쉽고 간편한(?) 루트였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저희 할머니, 할아버지도 고향이 북한이라 하셨습니다. 6·25 전쟁을 피해 백령도로 피난 오셨대요. 총과 포탄이 날아다니던 아비규환을 피해 산속에서, 때로는 동굴 속에서 숨 죽이며 지내셨다 합니다. 며칠을 굶기도 하고, 너무 배가 고파 뱀 잡아먹고 나물 캐서 연명했다는 일화를 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어르신들이 이렇게 전쟁을 피해서 온 실향민이었습니다. 손 내밀면 닿을 듯한 거리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져 가족과 연락을 할 수도, 만날 수도 없는, 그래서 명절이면 하염없이 바다 건너편만 바라봐야만 했던 분들이었습니다.


심리적인 거리가 먼 것뿐이지, 물리적으로는 북한이 서울보다 더 가까웠던 것이 사실입니다. 라디오를 켜면 북한 방송이 들렸어요. 주파수를 돌리다 보면 특유의 억양이 담긴 독특한 방송이 들렸는데, 듣는 재미가 제법 쏠쏠했습니다. 오히려 서울에서 송출하는 라디오는 듣기 힘들었고, TV마저도 SBS나 MBC는커녕, KBS 1TV만 유일하게 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귀가시계'로 명성이 자자했던 SBS의 '모래시계'를 본 적이 없습니다. 제가 살던 마을에는 SBS 신호가 잡히지 않았거든요. '치직-' 거리는 노이즈 화면만이 저를 반길 뿐이었습니다. 물론 지금은 기술이 좋아져서 다 잘 나옵니다. 이렇게 쓰고 보니, 탈북자라는 단어에 충격받은 제가 오히려 주제파악을 못했던 것 아닌가 싶긴 합니다.


내면에 폭풍이 한바탕 휘몰아친 이후, 애송이의 고민은 깊어졌습니다. 어떻게 해야 다음 방학 때 육지로 나왔을 때 탈북자라는 오해를 받지 않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내가 교양 있는 사람들이 두루 쓰는 현대 서울말을 자유자재로 구사할 수 있을까.


"그렇게 내 꿈은 TV가 됐어. 연진아."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 문장을 패스하셔도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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