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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Jan 22. 2023

"이제부터 내 꿈은 TV야. 연진아."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

"네가 뉴스 리딩은 전국 1등이겠다."

벅찼습니다. 아나운서를 준비하던 시절, 은사님이 건네준 칭찬에 십수 년 묵은 사투리 자격지심이 순식간에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물론 취업준비생이던 저를 격려하기 위해 MSG가 잔뜩 가미된 말이었겠죠. 그래도 가슴속 한 편에 묵직했던 치욕스러웠던 감정을, 구석에 오도카니 쪼그리고 숨어있던 9살의 안보라를 마음 편히 떠나보낼 수 있었습니다.


"이제부터 내 꿈은 TV야. 연진아."

뉴스는 교재였습니다. 발음과 억양을 배우기에는 드라마 보다 뉴스가 더 좋았습니다. 처음에는 서울 사람들은 어떻게 말을 하나를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나도 따라 할 수 있겠다' 용기가 생기면 한 마디, 두 마디, 한 문장, 두 문장을 따라 하며 '서울말'을 배워갔습니다. 그렇게 집중해서 뉴스를 보다 보니 아나운서들과 기자들이 얼마나 멋져 보이던지요.


TV 속에 담긴 세상 이야기를 보는 것도 좋았습니다. 내 주위는 온통 논과 밭과 산과 흙뿐인데, TV 속에서는 멋진 아파트로 둘러싸인 도심만이 가득했습니다. 가로등 하나 없던 시골 동네는 해가 지면 적막과 어둠만이 남아있는데,  도심은 늦은 밤에도 불이 번쩍이는 휘황찬란한 세상이었죠. TV를 보다 잠시 마당에 나가기라도 하면 꼬리를 바싹 치켜세운 검은고양이만이 형형한 눈동자를 빛내며 잔뜩 날이 선 채 저를 경계할 뿐이었습니다. 이상과 현실의 괴리는 극단적이었으나, 그 간극의 고단함이 저를 더 꿈꾸게 만들었습니다. '내가 저 TV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나는 TV에 나오는 사람이 되어야겠다.'


모방은 저의 힘이었습니다. 저는 10대에도, 20대에도, 30대에도 타인의 뉴스리딩, 광고 속 성우들의 목소리, 애니메이션을 만드는 성우들의 연기를 따라 하며 제 목소리를 가다듬었습니다. 아나운서 준비생 시절에는 통학길에 현직 아나운서들의 뉴스리딩을 녹음해서 듣고 다녔죠. 따라 해 보고, 그 걸 녹음해서 또 들어보고, 한 달 뒤에 들어보고, 6개월 뒤에 들어보곤 했습니다. 혹시라도 듣기 버거운 억양이나 의미 전달을 방해하는 나쁜 습관이 있지는 않을까 체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도 나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 모니터 하고, 부족한 부분을 고치려고 노력합니다. 언젠가 은사님을 또 만나면, 리딩은 여전히 네가 1등이더라, MSG 가득 담긴 맛있는 말을 꿈꾸면서요.


"여기까지 오는 데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어."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에서 문동은(송혜교 역)의 말 한마디에 저는 무릎을 쳤습니다. 저 역시도 오늘의 제가 있기까지 우연은 단 한 줄도 없었습니다. 김은숙 작가의 표현처럼, 1% 정도 신이 머무는 시간도 존재했습니다. 기적이 아니면 설명할 수 없는 순간들도 있었거든요. 저승사자와 하이파이브를 하고 다시 이생으로 돌아온 순간이 여러 번이었으니, 이건 신의 힘이 닿은 '천운'이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을 듯합니다. 위기의 순간을 넘길 기막힌 애드리브가 떠올라 전화위복의 계기를 만들었던 순간도 신이 잠시 다녀간 찰나였으리라 생각합니다.


개천에서 용 났다,는 맞는 표현입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저는 제가 애면글면 애썼던 수많은 노력의 날들을 떠올리며 미소를 짓습니다. 노력과 필연과 천운이 모여, 제가 이 자리에 왔습니다. 그리고 늘 그래왔듯 과거는 쿨하게, 오늘은 뜨겁게 살 거예요. 이렇게 오늘을 열심히 살다 보면 남은 제 생의 몇몇 날에, 뜻하지 않은 순간에, 신의 숨결이 와닿을 것이라 믿습니다. 그렇게 미래의 안보라는 오늘보다는 더 나은 사람이 되어 저만의 삶을 살아가겠지요. 10년 뒤의 안보라도, 20년 뒤의 안보라도 여전히 '용'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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