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앵커엄마 Jan 26. 2023

"네가 왕따인 이유는"-마침표

죽음 앞에 모든 삶은 공평하다.

1년쯤 지났을까요. 얄궂게도 그 아이의 아버지도 돌아가셨습니다. 아빠의 장례식 외에 다른 아빠의 장례식장을 간 건 이때가 처음이었던 것 같아요. 엄마는 제 손에 부의금을 들려주고는, 제가 유족에게 해야 할 행동들을 일러주셨습니다. 제 마음은 참 복잡했습니다. 두고 봐라, 벼르고 별렀던 제 마음 탓은 아니었을까 죄책감도 고개를 들었고, 아무리 발버둥 쳐봐야 모든 인생의 끝은 죽음이구나, 허무감도 밀려왔습니다. 무엇보다, 아빠를 잃은 그 친구를 만나면 가장 먼저 무어라고 해야 할지 몰랐어요. 거 봐! 이럴 줄 알았어,라고 해야 할지,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라고 해야 할지, 힘 내,라고 해야 할지.


저는 상가(喪家)에 가지 않겠다, 거절했습니다.  "그래도 사람이 그러는 거 아니야." 엄마는 나직이 다독이셨습니다. 사실 엄마는 1년 전의 일을 알고 있었다고 합니다. 제 일기장을 몰래 들여다보고 밤새 부들부들 떨었다고 하셨습니다. 딸 몰래 학교 선생님도 만나고, 친구들 부모도 만나 큰소리도 내셨습니다. 축축이 젖은 베갯잇을 볼 때마다 가슴이 미어졌을 엄마를 생각하면 가슴이 아픕니다. 저도 어린 딸을 키우는 입장에서, 제 딸이 이런 일을 당했다면 눈이 뒤집어도 백 번, 천 번은 뒤집어졌을 것 같아요.  미어지다 못해 해어져 너덜너덜했을 엄마의 마음을 조심스레 위로해 봅니다. (엄마, 나는 진작에 다 이겨냈어요.)


"... 미안해."


아버지의 영정을 뒤로하고 울음을 터트리던 친구가 짠했습니다. 시뻘건 눈, 퉁퉁 부은 얼굴, 일그러진 입술, 푸석푸석한 머리카락으로 초점을 잃은 친구의 모습을 보니 머릿속에 하얘졌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그저 친구의 손을 잡아주고, 어깨를 토닥이고, 한 번 안아주었습니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에 묵직했던 돌덩이 하나가 꽝- 부서졌습니다.




우리는 타임머신도 함께 만들었던 사이였습니다. 은어도 만들었죠. 편지도 써서 주고받으며 암호 해독하듯 읽었습니다. 휴일에도 만나 함께 놀았고, 비밀 얘기도 나누었습니다. 틴케이스에 플라스틱 우정반지와 수업시간에 주고받은 쪽지와 서로 좋아하던 친구의 이름을 적은 종이를 넣어 뒷마당에 묻었습니다. 그랬던 우리 사이가 어쩌다 이렇게 멀어졌을까요.


중학교에 진학해서도 (어쩔 수 없이) 같은 반이었지만, 제 기억 속에 그 아이는 이제 희미합니다. 물론 우리는 겉으로는 친했습니다. 우리 사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하지만 항상 불안했습니다. 질풍노도의 시기, 하루에도 수십 번씩 뒤바뀌던 변덕스러운 사춘기 소녀들 마음을 누가 아나요. 저역시 마찬가지로 변덕스러운 청소년기를 지나고 있었으니 누굴 탓할 일도 아닙니다.


고향에 오래 머물고 싶지 않았습니다. 제 삶의 터전이 백령도일 거라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습니다. 성공의 정의를 정확히 내리기는 어려웠지만, 성공이 무엇인지도 잘 모르지만, 일단 무조건 성공하고 싶었습니다. 무엇보다도, 바꿀 수 없는 과거에 미련 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내 힘으로 바꿀 수 있는 미래에 더 집중하고 싶었습니다. 오늘을 열심히 살면 분명 내일이 달라진다고 믿었습니다. 제가 17살에 홀로 육지로 나와 자취하며 고등학교에 진학한 이유입니다.


훗날, 그 아이는 결혼을 한다며 몇 년 만에 연락을 해왔습니다. 저는 계좌번호를 받아 약소한 축의금을 송금한 후에 연락을 끊었습니다. 값싼 우정이었던 걸까요, 이렇게 끝을 맺으라는 하늘의 배려였던 걸까요. 단돈 몇만 원으로 손절한 감정이 참으로 후련했습니다. 제게 연락을 해 준 게 오히려 고마웠습니다. 이제 더 이상 남아있는 돌덩이는 없었습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네가 왕따인 이유는"-3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