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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Jan 28. 2023

엄마의 외상장부-1

독서 습관

엄마에게 외상장부가 생겼습니다.  물건을 파는 가게인 건 맞는데요, 종합상사라고 하기도 뭣하고, 만물상이라고 하기에도 뭔가 적합하지 않은 느낌의 <이것저것 다 파는 가게>였습니다. 간판만 '00 상회' 수준으로, 무언가를 파는 가게인 건 맞는데 무엇을 파는지 유추하기 어려운, 상상력을 자극하는 그런 상호였죠. 그곳은 책방이자, 꽃집이기도 했고요, 때로는 근사한 선물가게이기도, 학생들에게 주전부리를 파는 구멍가게이기도 했습니다. 가게 사장님은 주기적으로 육지로 나가 물건들을 떼와서 팔았습니다. 책 한 권이 5,000원이면 유통비를 얹어 6,000원에 파는 식이었습니다. 이곳에 엄마 이름이 적힌 외상장부가 새로 생긴 겁니다.


"엄마, 어디 가는데?"

"따라와 보면 알아."


-땡그랑.

유리문에 달린 종소리가 청명하게 울렸습니다. 엄마는 무작정 제 손을 잡아끌고 들어갔습니다. 


"아구구. 하암~ 어서 오세요."

따스한 햇살에 절로 눈이 감기던 날이었습니다. 의자에 앉아 꾸벅꾸벅 졸던 사장님은 이내 눈을 뜨고 기지개를 켜며 손님을 맞이합니다.


"읽고 싶은 책 골라봐." 엄마가 손짓합니다. 눈에 희망을 가득 품은 채로.


<이것저것 다 파는 가게>에서 '서점' 역할을 하는 곳은 딱 한 칸의 책장뿐이었습니다. 딱 봐도 오래된 책,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새삥'은 티가 났습니다. 아무리 전시해 두어도 팔리지 않은 책들은 빛에 바랬습니다. 안타깝게도 제목도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았습니다. 가수 지코의 노랫말처럼 '잘 되면 셀럽, 못 되면 리셀러'인데, 죄다 리셀러가 될 형편에 놓인 것들 뿐이었어요. 누런 책을 집어 들면 제 마음 덩달아 피죽도 못 얻어먹은 사람처럼 누렇게 둥둥 뜰 것만 같았습니다.


'이거, 절호의 기회인데...' 엄마들이 무언가를 사준다고 하는 건 흔치 않은 기회입니다. 순수한 마음은 돼지고기까지만 이지, 대가 없는 소고기는 없다는데, 혹시나 무슨 저의(意)가 있는 것은 아닌가, 실눈 뜨고 엄마의 표정을 아무리 뜯어봐도 '대가 없는 소고기'처럼 보였습니다. 호기를 놓칠 순 없다는 생각에 눈에 불을 켜고 열심히 골라보려고 노력했습니다. 나만의 셀럽이 될만한 '새삥'을 골라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읽고 싶다는 열망이 강하게 오는 책은 없었습니다. 사실 책도 몇 권 없었고요.


"엄마, 나 읽고 싶은 책이 별로 없는데..."

"... 그래?"


곰곰이 생각하던 엄마는 사장님께 두 가지를 요구했습니다. 사장님이 육지에 나가 물건을 떼 올 때, 제 수준에 읽을 법한 책들을 사다 달라, 그것이 만화책이든 소설책이든 장르는 상관없다. 무조건 흥미를 돋울만한 재미있는 책이어야 한다.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걸 '외상'으로 해달라는 것이었습니다. 한 달간 하굣길에 제가 제집 드나들 듯 가게에 들러 보고 싶은 책들을 가져가게 하고, 그것을 따로 적어두면 엄마가 월급날 일괄 결제하겠다는 조건이었습니다.



<엄마의 요구 사항>


1. 만화책도 OK. 장르 상관없이 재미있는 책을 사다 줄 것.


2. 외상 장부를 따로 만들어 줄 것. (월말 일괄 결제)



"..."


모녀를 가만히 응시하던 사장님은 흔쾌히 수락했습니다. 객관적으로 놓고 보면 사장님께 굉장히 불리한 조건이었습니다. 결제날 잠수 타면 사장님 손해잖아요. 저라는 꼬맹이 손님도 미덥기는 마찬가지였을 겁니다. 기껏 생각해서 책을 사 왔는데 제가 집어 들지 않으면 '리셀러'용 재고가 쌓이는 위험부담도 감수해야 했으니까요. 하지만 저희 모녀의 눈빛이 평범치는 않았던 모양입니다. 요즘 같은 세상에서는 엄두도 못 낼 '외상'이지만, 그 당시 시골마을에는 종종 있었던 일이기는 합니다. 다만 그게 술과 음식이 아니라, 아이를 위한 책이었다는 게 남달랐을 것 같습니다. 사장님의 믿음만큼 엄마의 '월말결제'는 단 하루도 늦은 적이 없었습니다.


엄마는 외딴섬에서 자식들이 지식에 접근할 창구는 '책이 유일하다'는 생각이 강하셨던 모양입니다. 서점 하나 없는 외진 곳을 탓하는 대신 이렇게 사장님께 특별한 부탁을 하며 돌파구를 찾았습니다. 제게는 돈 생각 말고, 읽고 싶은 책은 마음껏 받아 읽으라고 주문하셨죠. 특별히 읽고 싶은 책이 생기면 주저 말고 주문하라 하셨습니다. 빠듯한 살림이었지만 책값은 하나도 아깝지 않다고 하셨습니다.


엄마의 또 하나의 조건이었던 '장르불문'. 책에 대한 흥미를 갖는 게 중요하니 만화책도 상관없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었고, 그 지론은 통했습니다. 처음엔 주야장천 만화책을 사다 봤습니다. 지루한 파트를 넘기고 끝까지 완독 했다는 성취감을 느낀 뒤에는 스토리에 갈망을 느껴 만화로 된 역사책을 보았지요. 그러다 이내 글밥이 많은 책으로 넘어갔습니다. 사장님이 사다 주신 책들이 다 재밌었던 기억이 있는 걸 보면, 아마도 대다수의 아이들이 좋아하는 베스트셀러 위주로 고르지 않으셨을까 생각해 봅니다. 물론 베스트셀러가 다 재밌는 것은 아닙니다만, 초보에겐 통계적으로 무난한 것만큼 적당한 것도 없죠. 지금도 전 만화책도, 웹툰도 좋아합니다. 글밥이 적다고 그 안에 담긴 내용과 철학이 가벼운 건 아니니까요.


아무튼 저는 새 책을 마음껏 사서 봤습니다. 엄마의 통 큰 결정 덕분에 책만큼은 부잣집 부럽지 않은 호사를 누렸습니다. 사장님께서는 2주 혹은 한 달에 한 번씩 육지로 나가 책을 사다 주셨어요. 이번에는 무슨 책일까, 설레는 재미도 있었고, 새 책을 받아 들고 특유의 인쇄향을 킁킁 맡는 것도 좋았습니다. 아무도 열어보지 않은 책장을 하나하나 넘기며 새 종이에 제 흔적을 남기는 것도 짜릿했습니다. 압력에 눌어붙은 종이들이 찢어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뜯던 기억마저도요.


새 책이 헌 책이 되어가는 과정도 좋았습니다. 재밌었던 구절은 연필이나 색연필로 그었고, 종이를 접어두며 저만의 흔적을 남겨두었습니다. 등하굣길에 벌레 하나 먹지 않은 고운 낙엽을 주워다 심혈을 기울여 코팅한 뒤 책갈피로 만들어 두기도 했죠. 다음 책이 올 때까지 보고 또 보고, 책을 읽을 때마다 다른 감정이 느껴지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독서의 첫 추억이 즐거워서일까요. 좋았던 기억은 습관이 되고, 그래서 저는 지금도 책을 볼 때 연필을 듭니다. 맘에 드는 구절은 줄 긋고, 당시의 생각도 기록해 둡니다. 그 다음번 읽을 때는 첫 독서와 비교해 생각이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적어두기도 합니다. 이렇게 책 한 권을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는 건 너무나 좋은 장점인데요, 단점도 있습니다. 지인들에게 대여하는 것도, 책을 기부하는 것 어렵다는 점입니다. 순간순간의 감정을 끄적여놓은 것이 지저분하기도 하고, 제 속마음을 들키는 것 같아 부끄러운 마음도 있거든요. 대신 제게 너무 좋았던 책은 새로 사서 선물하는 편입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들은 눈으로만 봅니다.)


이렇게 외상을 즐겼던(?) 엄마가 돌변했던 사건이 있었습니다. 지금도 마트에서 '이것'을 보면 마을에서 조리돌림 당하던 수치심을 잊을 수가 없네요. (외상이 마냥 좋은 건 줄 알았지, 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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