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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Jan 29. 2023

엄마의 외상장부-2

30원이 뭐길래


백설공주의 독사과라고 해야 할까요, 에덴동산의 선악과라고 해야 할까요. 외상의 시작은 달콤했으나, 끝은 파산이리라.


"아줌마, 이거, 이거, 이거요."

"그래. 적어둘게, 가져가."

"고맙습니다."


외상은 정말 달콤했습니다. 제게 돈이 없어도 원하는 책은 마음껏 볼 수 있었으니까요. 이거 얼마예요, 묻지 않아도 되는 당당함에 고개가 뻣뻣해졌습니다. 걱정 말고 보고 싶은 만큼 사서 보라니. 이보다 더 달콤한 말이 어디 있을까요. 처음엔 쭈뼛했던 손짓도, 어느새 익숙해져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책장에서 이 책, 저 책 골라 가방 속에 넣어오곤 했었습니다.


"집에 가자~"

무더운 한여름의 어느 날, 수업을 마친 참새들이 교문 밖으로 와글와글 쏟아져 나옵니다. 때맞춰 학교 앞 구멍가게 사장님은 새로 들어온 물건을 이리저리 정리하고 계셨습니다. 파리채를 분주하게 흔드시며 파리도 쫓고 먼지도 털고 아이들의 시선도 강탈하십니다. 이제 막 육지에서 들어온 과자며 초콜릿, 사탕들이 가지런히 자리 잡고 있었고, 어김없이 하굣길 아이들의 주머니를 유혹했습니다. 먼지 하나 쌓이지 않은 번쩍번쩍한 포장지에 참새들처럼 아이들이 몰려들었습니다. 저 역시도 무리 중 한 명이었죠.


"오, 이건 새로운 건데?"

뭐가 새로 들어왔나 둘러보다 눈에 띈 포장지 하나가 있었습니다. 콩알처럼 생긴 알맹이들이 알록달록 원색의 옷을 입은 사탕과자입니다. 영국의 유명 록밴드 <비틀스>의 이름을 딴 캔디였습니다. 첫맛은 사탕인데, 씹으면 캐러멜처럼 녹아내리는 신세계라니? 이 작은 알갱이가 왜 그리 탐이 나던지요. 이제 막 육지에서 들어온 상품이라, 아직 무더위에 녹아내리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렇다면 식감도 육지에서 먹는 것만큼이나 신선(?)하겠지? 마치 '리미티드 에디션' 같은 착각이 생기고 저도 모르게 물욕이 돕니다. '어머, 이건 꼭 사야 해!'


유혹에 무너지고 만 꼬맹이는 이걸 꼭 사야만 하는 핑계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집까지 걸어가려면 한 시간이나 걸린다니, 대체 언제 걸어가?

오늘은 또 왜 이렇게 더워?

하필 체육수업 있던 날이라 땀을 한 바가지 흘렸더니 너무 지쳐. 달콤한 게 필요해.

지금 배도 고파. 빵 사 먹을까?

아냐, 아냐. 빵은 금방 없어지잖아?

과자는?

아냐, 과자는 목이 말라. 가는 길에 수돗가도 없고. 과자는 안 돼.

어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저 <비틀*>밖에 없겠군.'


마음속으로 혼자 묻고 해답을 찾는 생쇼를 마쳤습니다. 셀 수 없이 많은(?) 알갱이를 아껴고 아껴 먹으면, 한 봉지를 다 먹을 때쯤이면 집에 다다르겠다는 계산까지 다 했죠. 이미 상상 속에서는 한 봉지를 모두 음미했습니다.


"이거 얼마예요?"

"300원."


주머니 속 찰랑거리는 동전을 세어봅니다.

'앗. 돈이 모자라다.'

이거 주세요, 손 내밀 수 있는 당당함이 사라지고 마음이 쪼그라들었습니다.


색색깔깔 사탕과자를 만지작, 만지작. 살포시 내려놨다가, 다시 조심스레 집어 들고 만지, 만지. 고심이 깊은 아이의 모습이 답답했던 모양입니다.


"아가, 얼마 있어?"

"... 270원이요."

"그럼 270원만 주고 가져 가."


"... 그럼 30원은요?"

"내일 가져와."


'와우, 내가 이걸 먹을 수 있다고?' 

갑자기 밝은 빛이 드는 느낌!


"이거... 외상이에요?"

"응. 외상이야. 잊지 말고 내일 꼭 30원 가져와."

"네!!!"


외상이 이렇게 쉬운 것이라니. 엄마가 책방 문을 밀고 들어갈 때는 참으로 결연했는데, 그럴 필요 없었잖아? 외상은 생각보다 쉬웠고, 가벼웠습니다. 그래, 30원이 뭐 대수라고. 내일 가져다 드리면 되지.


매일 아침 엄마께 받아오는 하루 용돈은 50원이었습니다. 내일 아침에 50원 받으면, 30원 갚고도 20원이 남네? 룰루랄라. 한 시간 내내 콧노래를 부르며, 사탕과자 봉지를 뜯었고, 하나하나 아끼고 음미하며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달콤한 사탕이 입에 녹아들어서인지 높고 거칠던 산길도 언덕길처럼 수월했습니다. 


"다녀왔습니다!"

"너 이거 뭐야. 무슨 돈으로 샀어?"

제 손에 들린 사탕과자 봉지를 본 엄마는 눈이 휘둥그레 해집니다. 엄마는 분명 아침에 50원만 줬는데, 왜 아이 손에 몇백 원짜리 과자 봉지가 들려있는 걸까요?


"아~이거? 아줌마가 외상으로 줬어."

"얼마를?"

"30원밖에 안 돼."


눈에 불이 번쩍한다는 표현을 저는 처음으로 체감했습니다. 비 오는 날 먼지 나게 맞는다는 표현도 이날 처음으로 실감했습니다. "감히 쪼그만 게~"로부터 시작된 잔소리는 저녁 내내 그칠 줄 몰랐습니다. 사랑의 매도, 사랑의 언어도 차고 넘치게 받았습니다.


"감히 쪼그만 게 대체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러냐, 어? 네가 지금 몇 살인데 벌써부터 외상질이야. 넌 대체 외상이 뭔지나 알고 하는 거야? 외상이 뭐야. 외상이 뭔데! 왜 말이 없어! 외상이 얼마나 무서운 건데! 네가 돈 한 푼도 안 벌어봤으면서 얼마나 겁이 없으면 덜컥 외상을 하고 와, 외상을!!! 그 아줌마도 그렇지, 대체 애한테 왜 외상을 주는 거야, 애가 뭘 보고 배우라고 세상에. 그거 하나 파는 게 중요해서 애한테 외상하고 가라고 한 거야? 기가 막히고 코가 막히네. 아이고야, 동네 사람들~ 우리 딸이 외상을 하고 왔어요~ 세상에, 마상에, 얘가 커서 뭐가 되려고 그럴까요. 제가 애 교육을 잘못 시켰습니다아아아."


저는 그대로 얼어붙었습니다. 엄마의 입에서는 쉴 새 없이 잔소리가 쏟아져 나왔습니다. 만담라는 게 이런 거겠죠? 비슷한 레퍼토리는 반복됐고 끝을 몰랐습니다. 죄인처럼 고개를 박고 저녁 내내 쏟았던 눈물을 모았다면, 그 눈물로 목욕을 해도 됐을 정도라고 생각했어요. (이 잔소리를 기억하고 있다니... 글을 쓰면서 복기하는데 저도 새삼 놀랐습니다.) 외상 30원은 다음 날 엄마와 함께 가서 눈물로 갚았습니다.


엄마의 분은 거기서 풀리지 않았습니다. 울며 잠을 청하는  딸을 뒤로하고 펜을 들어 편지를 씁니다. 처음엔 가게 사장님한테 쓰는 건 줄 알았는데, 30원 갚으러 함께 찾아갔을 때 꺼내지 않으시더라고요. 일기를 쓰셨나 했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후, 엄마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라디오를 켭니다.


"다음 사연입니다. 백령도라는 저~먼 섬에서 편지 한 통이 도착했군요. 안녕하세요~ 저는 아들, 딸 두 아이를 키우는 엄마입니다. 얼마 전 우리 딸이 외상 30원을 하고 왔습니다..."


KBS 라디오 <안녕하세요, 황인용 강부자입니다>라는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엄마는 외상 스토리를 구구절절 적어서 라디오에 사연을 보냈던 것입니다. 사연은 채택되어 강부자 선생님께서 읽으셨어요. 인자한 목소리로 사연을 듣고 있자니, 엄마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습니다. 


'아빠 없이 자라서 그렇다'는 소리를 들을까, 남들보다 더 엄하게 키웠다, 그런데 아이가 외상을 했다는 소리를 듣고 나니 '내가 그동안 애를 잘못 키웠나' 마음이 무너지더라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어린것이 그게 얼마나 먹고 싶었으면 외상을 하고 왔을까 싶은 마음에 속이 많이 상하셨다고 해요. 그래도 외상 10원이라도 그릇된 행동으로 가는 건 싫다고 하셨습니다. 결국 매를 들었는데, 앞으로 애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너무나 어렵다는 고민에, 진행자들은 깊이 공감하며 이런저런 따뜻한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새삼 내가 정말 잘못했구나 반성도 많이 했고요. 


하지만 왜 마을 사람들을 다 불러 모아서 공개적으로 망신을 주신 건지 원망스러웠습니다. 다들 절 보며 한 마디씩 보태셨거든요. "오구오구, 보라가 외상을 해쪄?"


여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라디오 프로그램에서는 편지 채택의 대가로 선물을 보냈습니다. 라디오 방송이 녹음된 테이프 여러 개와 부상으로 김치통 같은 살림살이를 보내주셨지요. 엄마는 라디오 사연 채택 청취 자리에 초청했던 동네 어르신들께 부상을 골고루 나눔 하신 후, 또다시 문제의 방송이 담긴 테이프를 동네방네 돌리며 다들 한 번씩 듣게 하셨습니다. 밤사이 이불에 지도를 그려 키를 쓰고 소금 얻으러 다니는 심정이었다고나 할까요. 수치스러움이 하늘을 찔렀습니다.


저는 잊을만하면 동네 어르신들께 "보라 이제 외상 안 하니?" 질문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옛말에 좋은 소리도 세 번 하면 하면 듣기 싫다 했습니다. 한 사람이 한 마디의 잔소리를 한대도, 열 집 어르신 말씀이 모이면 열 마디였습니다. 테이프는 동네에서 끝도 없이 돌고 돌았지요. 시골마을에서 보낸 사연이 채택된 게 신기했던지 어르신들은 듣고 또 들으셨습니다. 저의 치부가 '박제'된 느낌이었습니다. 저는 다시는 외상을 하지 않겠다, 사무치는 각오와 약속을 하고, 녹음된 테이프를 빼앗아 필름을 주르륵 빼 버렸습니다. 엄마는 웃으셨습니다.


엄마도 미안했던 모양입니다. 하루 용돈을 100원으로 올렸습니다. 50원에서 100원으로 두 배나 껑충 오르다니, 밑지는 장사는 아니었네, 싶었습니다. 사흘만 모으면 사탕과자가 제 손에 들어오니까요. 참으로 국민학생다운 단순한 사고방식이었습니다.


'다시는 외상을 하지 않겠다' 다짐했지만 저는 여전히 엄마께 '외상' 장부를 올려놓습니다. 주말마다 아이를 봐주시고, 매번 친정에 다녀올 때마다 국에 반찬까지 바리바리 한 짐 싸주십니다. 당신 보약은 안 해 드셔도 제가 아플 때는 약 한 재 꼭 지어주시고요. 새벽 근무하느라 피곤해하면, 주말에라도 푹 자야 한다며, 제가 자는 방에 커튼을 치시고는 아이를 데리고 놀이터, 문구점, 동네 친구 집으로 외출을 나가십니다. 저는 해가 중천에 뜨면 느지막이 일어나 엄마가 차려놓고 가신 밥상 앞에 앉지요. 저를 아나운서로, 앵커로 이렇게 바르고 훌륭하게 키워주셨는데, 엄마께서 주신 사랑은 아직 갚을 일이 요원합니다. 깊고도 높은 사랑은 여전히 '외상'인 거죠. 엄마,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얼른 갚을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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