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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Feb 04. 2023

왜 이름을 뒤에 부를까, 연진아.

내 멋대로 해석한 <더 글로리>

<어떻게 말할래?> 시리즈를 쓰고 있습니다. 어떻게 말할래? (brunch.co.kr)



※이 글은 넷플리스 드라마 <더 글로리>를 감명 깊게 본 팬의 과몰입 분석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화제의 드라마 <더 글로리>. 다들 '재밌다, 재밌다' 노래를 부르길래, 무슨 드라마길래 저렇게 찬사를 아끼지 않는 건가 궁금했습니다. 뉴스를 진행하는 사람이기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는 콘텐츠는 가급적 다 찾아서 보는 편입니다. 그게 뉴스이기도 하고, 뉴스가 되기도 하니까요. 제가 먼저 빠져들어 즐기기도 하고, 때로는 일과 연관돼 의무적으로 시청하기도 합니다. (배우나 감독이 뉴스에 출연할 경우). <더 글로리>도 첫 시작은 '줄거리만 볼까?'였습니다.


드라마의 흡인력은 강력했습니다. 달이 지구를 당기듯, 드라마의 모든 부분이 시청자를 압도하며 극 중으로 끌어당겼습니다. 저는 확신했죠. 한 번도 안 본 사람은 있어도 한 편만 본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시나리오와 연출, 연기가 탄탄했습니다.


저는 드라마나 영화를 볼 때, 배우들의 발성, 음성, 대사, 호흡, 몸짓까지 모든 표현을 하나하나 분석하는 걸 좋아합니다. 스피치를 잘하기 위해서 꼭 필요한 부분이거든요. 방송할 때도 많은 도움을 받습니다. 역시나 <더 글로리>에서도 눈에 띄는 대사와 형식들이 있더군요. 어쩌면 제 순수한 궁금증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왜 이름을 뒤에 부를까.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 박연진."


"브라보! 멋지다, 연진아!"


"이런 걸 잘못이라고 하는 거야. 스튜어디스 혜정아."


"나의 체육관에 온 걸 환영해, 연진아."


동은은 가해자들의 이름을 뒤에 붙여 부르곤 합니다. 어순이 일반적이지 않고 낯섭니다. 그래서 더 눈길이 가요. 유행어도, 인터넷 밈(Internet meme)으로도 확대재생산되고 있습니다. 김은숙 작가는 어떤 효과를 노리는 걸까요?


#1. 비밀은 어순에 있다.


"한국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안다"는 말, 많이 들어보셨죠? 중요한 내용은 주로 말미에 담겨있다는 뜻입니다. 우리말의 기본적인 문장구조는 주어-목적어-서술어입니다. 여기서 핵심은 결과를 나타내는 '서술어'가 뒤에 있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볼게요.


기말고사 시험 날. 아이가 헐레벌떡 시험지를 들고뛰어 옵니다.


"엄마!! 엄마!!!!!!!!!!!!!!!!!"

"왜, 뭔데. 왜 그래?"

 "나 수학 시험!!!!!!!!!!!!!!!!!"

"수학 시험, 뭐?"

"나, 나, 수학 시험...흐흐흐흑"

"어우 답답해. 왜 울어! 울지 말고 얘기해."

.

.

"백 점 맞았어!!"


"엄마, 나 수학 백점 맞았어." 해피엔딩이죠?

중요한 건 서술어입니다. 앞에서 백날 목적어 말해봐야, 그래서 뭐, 뭔데, 상대방의 궁금증만 유발할 뿐입니다. 수학 시험이 '빵점'인지, 한 개 틀렸는지, '만점'인지. 시간 끌어봤자 앞에서는 결과를 알 수 없는 거죠. 동사 하나만 바뀌어도 문장 전체의 의미가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압니다. 어쩌면 한국인들은 '말의 끝'에 집중하도록 훈련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참고로, 어순이 우리와는 다른, 주어-서술어-목적어 형태를 갖는 영어는 어떨까요?


"Mom!!!!!!!"

"What?"

 "I got a perfect score on the math test."


이미 got에서 게임 끝났습니다. 엄마에게 중요한 건 got 아니면 did not get 일 테니까요. (물론 행복은 성적순이 아닙니다. 오해 마세요.)



확장된(혹은 과장된) 다른 사례 하나 더 들어보겠습니다.

뼛속까지 꼰대인 부장님이 있습니다. 팀원들 앞에서 혼잣말인 듯, 아닌 듯, 주어가 있는 듯 없는 듯 말합니다.


"요즘 애들은 말이야. 참 예의가 없어. 엘리베이터를 타면 인사하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나 때는 말이야, 모르는 사람이 타고 있어도 무조건 인사부터 하고 탔는데. 딱 봐도 부장인 내가 타고 있으면, 부장님 안녕하세요오~하고 기분 좋게 인사하면 좀 좋아?"


팀원들은 아리송합니다. 대체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지, 누굴 향해 하는 말인 건지, 알 수가 없죠. '우리 팀원인가, 아니면 옆 부서 직원인가?' 아침부터 무엇 때문에 저기압인지 알 수가 없으니까 어쩔 수 없이 감각을 일깨워 부장의 입에 집에 집중해 봅니다.


"안녕하세요오~ 좋은 아침입니다아~ 이 소리가 안 나오나 보지? 안 그래, 김 대리?"


기나긴 서사 끝에 드디어 결말이 나왔습니다. 실은 자신에게 인사하지 않은 김 대리를 욕보이고 싶었던 겁니다. 김 대리가 못 봤을 수도 있고, 딴생각으로 멍 때리고 있을 수도 있었는데, 부장님은 그런 옵션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죠.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강조하기 위해서/ 청자들에게 끝까지 귀 기울여 듣게 만든 후/ 가장 중요한 부분은 꼭 집어 끝에 내놓는 효과를 쓴 겁니다. '설마 나는 아니겠지...' 아무 생각 없이 듣고 있던 김 대리는 아침부터 울화통이 터집니다. 부장이 의도한 '극적인 효과'가 성공을 거두는 순간입니다.



<더 글로리>로 다시 가봅니다. 동은은 가해자들의 악행을 줄줄이 읊고, 그 뒤에 이름을 붙이곤 합니다. 혹은 '알록달록'처럼 예솔이의 친부를 암시하는 핵심 정보를 강조하기도 합니다.


"너네 주님 개빡쳤어. 너 지옥행이래. 사라야."

"근데, 재준아. 넌 모르잖아. 알록달록한 세상."


우리는 드라마를 보며, 은연중에 말미에 붙은 어감을 중요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리고 문동은이 궁극의 목적으로 하는 것, 가장 중요하다고 여기는 것을 명확히 이해하게 됩니다. 바로 그 '이름들'에 대한 '천벌'이라는 것을요.  


#2. 도치법


이를 국어 문법적으로 풀어보면 도치법으로 설명이 됩니다. 백과사전에 나와있는 도치법의 정의는 이렇습니다.


도치법 : 정상적인 언어 배열 순서를 바꾸어 놓음으로써 강한 인상을 주려는 표현 기법.



출처 :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5화

"이런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웬일로?"


"나 진짜 궁금해서 그러는데, 사라야. 넌 진짜 신이 있다고 생각해? 정말로?"


"너 방금 그 말 신성모독이야. 회개해, 천벌 받기 싫으면."

"너 x돌았니? 약 x먹었어?"


"약은 네가 먹던데? 다양하게? 자주?"




도치법은 수사법 중 변화법의 하나입니다. 논리적이지 않아요. 문법적으로도 완벽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극적입니다. 문장의 주어와 서술어를 바꾼다든지 등의 변화를 주는 방식으로 작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것, 말하는 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을 극대화시키는 효과가 있습니다.


극단적인 선택까지 시도하려던 동은이가 복수를 꿈꾸며 뼈를 깎고 살을 갈아 재기하는 이 극적인 인생을 표현하는 데 있어, 이보다 더 효과적인 수사법은 없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드라마 <더 글로리>를 통해 어순의 변화와 도치법에 대해 살펴봤는데요, 주로 시나 소설 등 문학작품에서 자주 보는 효과들입니다. 논술 같은 논리적인 글쓰기에서는 추천하지 않습니다. 낯선 만큼 효과는 극적이지만, 너무 자주 쓰면 효과가 반감되거든요. 다만, 메시지 전달을 위해 딱 한 번만 쓴다면, 그건 추천합니다. 대신 글의 내용 전체를 포괄하는 아주 강렬한 메시지여야겠죠? 중요한 사업을 수주해야 하는 프리젠테이션이나, 혹은 공공의 영역에서 공식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발표에서도 주의할 점은 마찬가지입니다. 과유불급을 잊지 마세요.


이 같은 말하기는 사적인 말하기에서 활용해 보시면 좋을 것 같습니다. 드라마에서 보다시피 대화의 긴장감을 높여주기도 하고요, 말과 글을 더 맛깔나게 만들어주기도 합니다.

친구나 지인과 대화할 때, 연인과 사랑의 밀어를 속삭이며 애정을 쌓을 때 대화의 긴장감과 극적인 효과를 위해 쓰면 좋은 도구들입니다.


가수 겸 배우 수지(출처: 네이버 프로필)

"오늘 저녁 먹자. 나랑. 단 둘이."


네..? 이 눈빛으로요...?

여자인 저도 바로 달려나갑니다. (팬입니다.)














다음은 <더 글로리> 에 푹 빠진 팬으로서 쓴, 지극히 개인적인 해석입니다. 실제 대사들을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볼게요.


다정한 그 이름, 연진아.


출처 :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1화

"오늘부터 내 꿈은 너야.

우리 꼭. 또 보자, 박연진."


연진에게 복수를 다짐하는 어린 시절의 문동은 역입니다. <박.연.진.>에 방점을 찍어봅니다.


학교를 자퇴하고 복수를 다짐했던 날. 동은이는 연진에게 꿈을 선포하고 마치 자신에게 각인시키듯 박.연.진. 세 글자를 힘주어 말합니다. "박연진, 우리 꼭,  또 보자."가 아닌, "우리 꼭, 또 보자, 박연진."이라고 말하죠. 말미에 이름 석 자를 꾸욱- 꾸욱- 눌러서 불러주어야만 합니다. 그래야 나의 뇌에, 나의 가슴에 복수를 새길테니까요. 저 말은 연진이를 향하기도 하지만, 본인 스스로에게도 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우리 꼭, 또 보자"는 "이 고통을 꼭, 잊지 말자"라고 강조하는 의미로도 해석되니까요.


출처 :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3화

"브라보! 멋지다, 연진아!"


10대에도, 20대에도, 30대에도. 오로지 '꿈'인 연진을 향해 절치부심한 문동은. 자신이 짠 판인 '체육관'에 드디어 복수의 대상들이 들어오게 되고, 동은은 두 팔을 높이 들어 연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브라보를 외쳤지만, 사실은 이제 막 본 게임을 시작하는 자신에 대한 자축의 의미는 아니었을까요?


복수만을 꿈꾸며 웃음기 없이, 숨죽이며 살아왔을 동은은, 마침내, 두 손을 번쩍 들어 연진을 환영합니다. 본격적인 복수의 서막을 알리면서도, 이제 알에서 깨어나 복수의 날개를 펼치겠다는 선전포고이기도 했습니다. 이때는 목소리 톤도 표정도 확 달라지더라고요. 재준이의 말대로 '알록달록해졌습니다'.


어른이 된 문동은은 친구들(가해자들) 이름 앞에 성을 잘 붙이지 않습니다. 마치 오랫동안 교류했던 친구를 부르는 듯합니다. 다정하게요. 절치부심의 세월 동안, 하루라도 그 이름 잊어버릴까, 되뇌고 되새겼을 겁니다. 매일같이 부르고 생각하다 보니 정말 절친한 친구처럼 가까워진 것 같은 이름들. 이름이 친숙해질수록, 이 복수의 끝도 가까워지는 것이겠죠. 다정함과 복수. 어울리지 않는 단어지만, 그래서 더욱 극적으로 대비됩니다.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

출처 :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8화

"이런 걸 잘못이라고 하는 거야, 스튜어디스 혜정아."


다 알면서, 다치는 줄 알면서, 매일매일 죄책감 없이 하던 것. 바로 이 '뜨거운 것'. 동은은 '행동파' 역할을 했던 혜정에게 똑같이 '뜨겁게' 행동으로 보여줍니다. 스튜어디스는 혜정의 꿈이었습니다. 꿈을 현실로 이룬 혜정 앞에, 자신만의 꿈을 완성해 가는 연진. 그 꿈에 한 발 더 다가서는 장면입니다. '너만 꿈 이뤘니. 나도 20여 년 간 갈고 또 갈았던 꿈, 드디어 이루려 한다.'



 지옥이었던 체육관, 이제는 너의 지옥.


출처 : 넷플릭스 드라마 <더 글로리> 4화


"나의 체육관에 온 걸 환영해. 연진아."


체육관은 지옥이었습니다. 그 지옥을 가해자인 연진에게 똑같이 선물하고 싶은 동은. 자신에게 지옥을 보여주었던 연진을 '환영'합니다. 환영의 사전적 의미는 '오는 사람을 반갑게 맞음'입니다. 역시나 지옥과 반가움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단어입니다. 그래서 더 극적인 것입니다.


<더 글로리> 시즌2를 보려면 한 달 남짓 더 기다려야 하네요. 이 주제로 글을 써야겠다, 생각한 순간부터 드라마를 여러 번 반복해서 보고 의미를 찾고, 고민했던 것 같습니다. 보면 볼수록 이 복수가 어떻게 그려질지, 또 어떻게 끝이 날지 궁금해집니다. 혼자서 결말을 썼다 지웠다, 수십 번 반복합니다. 뒤늦게나마 정의가 정말 구현될까요.


<더 글로리>는 '고데기 학교폭력 사건'이라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드라마입니다. 하지만 세상은 변하지 않았어요. 해당 사건 발생 후 17년이 지나도 학교폭력은 여전합니다. 지금도 어디에선가 현실 속 '동은'이는 말 못 할 고통으로 잔뜩 웅크리고 있을 겁니다. 세상 무서운 줄 모르는 가해자들에게 정말 철퇴가 내려질까요. 그래서 현실 '학폭'에 조금이나마 개선의 메시지가 던져질까요. 학교폭력 사건의 당사자들은 '천벌받으면 어떡하지...' 걱정과 공포로 하루하루 시들어 가고 있을까요. 


문득, 동은의 내레이션이 떠오릅니다.


"난 네가 시들어가는 이 순간이 아주 길었으면 좋겠거든.

우리 같이 천천히 말라죽어보자,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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