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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Feb 06. 2023

엄마는 때리고 싶다

공이어서 다행이다

매일같이 생방송 뉴스 진행하는 워킹맘입니다. 그날따라 방송도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았고, 그날따라 아이 유치원 친구  생일선물도 잊었고, 그날따라 주차하다가 차를 긁었니다.


왜, 그런 날 있잖아요. 가만히 있어도 가슴속에서 화가 솟구치고, 손발이 제멋대로 부들부들 떨리는가 하면, 누가 '툭' 건들기만 해도 활화산이 될 것만 같은 그런 날.


-따르르릉.

전화를 걸었습니다.


"오늘부터 바로 때릴 수 있나요?"


다짜고때리고 싶다는 말에, 강사님은 웃으며 "일단 오십셔~" 부드럽게 맞받아쳤습니다. 그렇게 테니스에 입문했습니다.


"상담도 없이 바로 등록하신다고요?"

"네. 오늘 수업 안 하고 가면 제가 대문이라도 부술 것 같아서요.^^^^"


첫인상이 인상적이었나 봐요. 라켓을 꽉 쥐고 뭐라도 때려 부술 것처럼 이리저리 힘껏 휘두르는 제게, 강사님은  아서라, 이러다 사람 친다. 라켓 그렇게 흔드는 거 아니다, 엄하지만 부드럽게 제지하셨습니다. 그러고는 원하는 만큼 쳐보라며 공을 튕겨주시더라고요. 어깨가 빠지도록 휘둘렀습니다.


텅-

텅-


제가 다행히 운동신경은 좋습니다. 테니스는 처음이지만 공을 놓치지 않았습니다. ("놓치지 않을 거예요." 이영애 ver.) 라켓에 걸리는 대로 무조건 공을 때렸습니다.  좋더라고요. 야구 배트는 헛스윙하기 일쑤였는데, 그래서 화를 돋웠는데, 역시 테니스 라켓은 면적이 넓으니 빗맞아도 일단 펑- 소리는 났습니다.


 배드민턴을 할까, 테니스로 할까 살짝 고민했습니다. 그래도 때려야 맛이지! 빈 공간을 채우는 '펑' 소리가 듣고 싶어 테니스로 골랐는데, 음 역시 제 선택이 옳았어요. 라켓 좀 잡아봤냐는 입에 발린 칭찬도 함께 받았습니다.  그제야 들끓던 용암이 수그러듭니다.


훗날 들은 얘기로는, 정말 제 눈빛이 사고 칠 것 같았답니다. 원래 첫날은 자세 연습만 하는데, 특별히 공을 치게 해 주셨다고 해요. "뭐가 그리 스트레스였냐" 물으셨는데, 막상 왜 그랬지? 생각해 보면 머릿속은 또다시 백지입니다. 시간이 지나면 잊히고 말 스트레스에, 저는 왜 그렇게 가벼이 끓어올랐을까요.


4개월이 흘렀습니다. 여전히 저는 테린이지만, 이제는 제법 힘조절도 하고, 공을 굴려서 쳐보기도 합니다.


공 하나에 스트레스와,

공 하나에 걱정과,

공 하나에 한숨을 실어 날려 보냅니다.


치고 보니 보라색 연못에 노란 개구리알을 낳은 것만 같습니다. 이 노오란 알들이 하나하나 다 저의 스트레스였습니다.


일주일 뒤면 아무도 기억하지 못할 자잘한 실수들을 놓아버리지 못하는 소심한  음과, 99%는 일어나지 않을 일에 대한 걱정과 상상으로 뇌주름살을 깊게 만드는 쓸데없는 정성과, 라져야 한다는 걸 알면서도 어제와 똑같은 오늘을 사는 어리석음이 곳곳에 던져졌네요.


이내 겸손한 마음으로 공받이를 들고 하나하나 쓸어 담습니다.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떠나는 이의 뒷모습처럼 아름답기 위해, 제가 낳아 놓은 스트레스들을 주섬주섬 챙겨 깔끔한 코트로 돌려놓습니다. 스트레스를 버리고 '리프레시'를 얻었습니다.


저만 그런 거 아니죠? 샌드백이든 베개든 무엇이든  때리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애먼 대문, 애꿎은 타이어 발로 찰 뻔했습니다. 테린이가 테린이에게 권해봅니다. 테니스, 참 좋네요.


 화를 받아줄 코트는 생각보다 고요, 그 안에서 화를 풀어내는 제 모습도 꽤 건강했습니다. 무엇보다, 코트는 말이 없어서 좋더라고요. 감정이 어떤데? 왜 그런데? 무슨 일인데? 묻지 않고, 그저 묵묵히 한숨이 담긴 공을 받아주어서, 그래서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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