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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앵커엄마 Dec 13. 2023

낙엽도 엄마 옆에 있게 해 줘.

아이의 선물

-산책 갈까?


집에서 사부작사부작 색종이를 갖고 놀던 아이가 용수철처럼 튀어 오른다. 산책은 아이들을 강아지로 만드는 마성의 단어다. 경박스럽게 꼬리를 흔들어대는 강아지처럼 부산스레 옷을 주워 입더니 어느새 현관 앞에 서서 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고 있다. 미소가 눈부시다. '유치원 갈 때도 이리 빨리 해주면 안 되겠니?'


우리 집 앞에는 경의선 숲길이 있다. 분주한 도심 한가운데에 있지만 6세 꼬마와 손잡고 걷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사막 속 오아시스다. 이른 새벽부터 늦은 밤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발도장을 찍고 간다. 주말에는 데이트하는 연인들이, 평일에는 식후 가볍게 산책하는 직장인들이 많다.  산책로가 그리 길지는 않아도 있을 건 다 있다. 양 옆으로는 계절이 바뀔 때마다 온몸으로 변화를 드러내는 나무들과, 지자체에서 관리하는 정갈한 꽃밭, 자그마한 운동기구들도 있다. 여름엔 물분수가 나오기도 한다. 무엇보다 맛집과 자그마한 카페들이 오아시스의 운치를 돋운다. 


아이는 산책을 나가면 날아다닌다. 발이 땅이 닿을 틈이 없이 뛰어다니기 바쁘다. 아가 시절에는 꽃밭 곁을 맴돌기를 한 세월, 풀잎 한 포기까지 일일이 참견하느라 열 발자국 나아가기도 어려웠다. 기분이 좋으니 뭘 해도 몸이 날아갈 것만 같겠지. 새로운 신발 대신 매번 새것 같은 기분을 신고, 아이는 날아다녔다.


아이의 즐거움 중 하나는 낙엽을 주워오는 일이다. 당연히 엄마아빠에게 주는 '선물'이다. 미간에 깊은 주름까지 만들어가며 심혈을 기울인다. 벌레 먹은 이파리는 탈락. 비대칭은 예쁘지 않으니 탈락. 사람들이 오고 가는 길목에서 이리저리 밟히는 낙엽도 탈락. 조선시대 세자빈 간택보다 더 꼼꼼하다.


아이의 콧대 높은 기준에 딱 맞는 낙엽을 고르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지만, 그걸 선물로 받아들이는 내 입장도 여간 곤란한 게 아니다. '쓰레기를 또...' 속마음은 감추고 아이의 기준치를 뛰어넘는 호들갑으로 맞아줘야 한다. 슈퍼파워 리액션을 기대하는 초롱초롱한 눈빛을 마주하면 나는 노홍철을 삼킨 것처럼 오버액션을 취하고야 만다. 엄청난 노력과 내공이 필요한 일이다.  


어떻게 하면 '낙엽 조공'을 멈추게 할 수 있을까. 어려운 과제다. "하지 마." 하면 끝날 것을 안다. 매우 실망하겠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달려오는 일, 티 없이 해맑게 웃으며 낙엽을 건네는 일 따위는 다시는 하지 않겠지. 일차원적 잔소리는 쉽다. 하지만 거기까지다. 아이 머리가 더 크면 한 마디는 열 마디가 되고, 아이가 내게서 열 걸음 더 멀어지는 길이리라. 아이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으면서, 아이의 조공을 한없이 기쁘게 받으면서, 집 안에 쓰레기를 들이지 않기 위한 마성의 단어가 필요했다. 


그것은 바로 엄마와 아기였다. 너와 나처럼. 일단 1차 리액션 개시.


-어머나~ 이게 뭐야? 정말 예쁘다~ 어쩜 이리 예쁜 낙엽을 골랐을까? 우리 강아지처럼 귀엽고, 티 없고, 참 곱다. 정말 고마워. 엄마 감동했어.

-엄마, 어서 주머니에 넣어. 집으로 가져가야지.


아이의 눈동자가 빛난다. 


-아, 엄마도 집으로 가져가면 참 좋겠는데... 그런데 낙엽이 슬프다는데? 

-왜?

-낙엽의 엄마는 누구야?

-음... 나무?

-그렇지. 우리가 낙엽을 가져가면 엄마와 아기가 헤어져야 해. 낙엽은 엄마 옆을 떠나서 슬프고, 나무 엄마도 아기가 옆에 없으면 날마다 울 것 같아. 엄마는 회사 갈 때 너랑 잠시 떨어져 있는 것도 슬픈데, 나무 엄마는 얼마나 슬프겠어? 낙엽 아가가 언제 돌아올지 모르잖아. 너도 누가 예쁘다고 데려가고 나서 엄마한테 데려다주지 않는다고 생각해 봐. 엄마를 만날 수 없다면 얼마나 슬프고 무섭겠어? 


끄덕끄덕. 아이가 깊은 고민에 빠진다. (귀엽다...)  

이내 글썽인다. (넌 F구나.)


-엄마, 그럼 우리 사진만 찍고 낙엽을 엄마 옆에 데려다주고 올까? 

-그래! 그거 너무 좋은 생각이다! (아싸. 성공이다.)


카메라를 들었다. 아이의 자그마한 손에 낙엽이 가지런히 놓였다. 나도 양심이 있으니 요리조리 열심히 사진 찍는 성의를 보여준 후, 기쁜 마음으로 낙엽을 풀밭에 내려놓았다. 이제 주머니는 깨끗해질 일만 남았다. 털어도 털어도 끝없이 나오는 낙엽 조각을 치우는 일 따위는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무엇보다, 아이의 동심을 지켜주고 아이의 사랑도 듬뿍 확인했다. 이 시기가 좀 더 오래갔으면 좋겠다. 나중에는 용돈이나 쥐어주고 제발 엄마에게 낙엽이라도 주워와 줄래? 해야 할지도 모를 일.


<오늘 엄마아빠는 육아레벨이 +1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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