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도수맥주, 커피, 콜라를 좋아하는 남자와 그렇지않은 여자가 살아가는 법
잘 잤어?
어 잘 잤어. 너두 잘 잤어?
L'Infusion Bonne Nuit(숙면에 좋은 차) 마셨는데 나쁘지 않더라
그래? 나는 어제 그 티잔 티백 두 개 넣어 마시고 잤어
오늘 아침에 저 얘기를 듣고 티잔 몇 통 더 사두려고 까르푸를 오전에 가려고 허둥지둥 서둘렀지만 벌써 시간은 10시를 넘어가고 있다. 아이가 이번 9월 중순부터 내년 6월 말까지 교외활동으로 무엇을 할지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벌써 11시가 다 되어간다.
개학 후 첫 번째 토요일은 la journée des associations 혹은 Le forum des associations이라고 해서 왠만한 동네에선 방과 후 스포츠 음악 문화 활동 등 회원을 모집하는 큰 연례행사가 있다. 대부분 작년에 했던 것을 다시 하는 경우가 많지만, 우리 나영이는 3년을 꾸준히 한 것은 없다. 보통은 내가 권유한 것을 아이가 하거나, 아이와 함께 저 행사장에서 함께 신청한 경우가 많았다.
작년의 경우에는 재작년에 했던 피아노는 거부해서 음악원은 신청하지 않았다. 미술활동은 그림 그리기와 점토 만들기 두 강좌를 신청했지만, 둘 다 마치고 집에 데리고 오면 저녁 여덟 시가 다 되어가는 늦은 시간이었는데, 제이가 직장에서 스트레스 가득에 술이 취한 경우에는 상황이 너무 꼬이고 어둡고 날까지 추워지고 비가 오는 경우도 많아서 아이가 너무 혼란스러울 것 같아서 한 학기만 하고 그만두었었다. 체육활동은 빙상스케이트와 아크로바틱 체조를 했는데 이번에는 체조는 빼고 스케이트는 계속하고 체조 대신 수영을 신청하고 싶다고 한다.
바로, 이 수영 신청과 관련해서 인터넷을 들여다보고 전화하고 하다가 시간이 훅 지나가버렸다. 한국 같았으면 이것이 이렇게 시간을 잡아먹을 일인가 싶어서 답답해하다가, 결국은 수퍼를 가는 길에 버스를 수영장 근처에 내려서 걸어가서 거기에 신청접수를 어떻게 하라고 되어 있는지 직접 확인하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인터넷 홈페이지에는 9월 둘째 주까지 수영장 실내 점검을 위해 문을 닫는다고 되어 있고 접수는 다음 주라고만되어있다. 하지만 작년에 수영을 신청하러 10시에 갔을 때 한 시간 반을 서있다가 인원초과로 포기하고 돌아오지 않았던가. 어떤 이가 하는 말이 자신도 재작년에 선착순에 못 들어서 오늘은 새벽 6시에 와서 줄을 섰다고 했었다. 음... 수영신청이 이렇게까지 비장한 각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혹시라도 인터넷만 믿고 잘못된 정보를 가지고 잘못된 날 가서 새벽에 줄을 서면 안될 일이지 않은가.. 그러니 직접 가서 게시판을 확인하는 수밖에. 한 가지 소원은 작년처럼 엄마 하나가 느지 막히 온 동네 친구의 아이들 거까지 대리 신청해 주는 부조리한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는 행정은 더 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아.. 운명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 이런 생각도 든다. 수영.. 이번에 꼭 신청하고 싶다.
나가다 보니 프린세스 할머니가 또 정원의 중간에서 웅크리고 집을 향해 앉아 있는 것이 또 보인다.
뭐야, 벌써 배 고픈 거야.
이 소리를 듣고는 벌떡 일어나 계단을 덤벙떰벙 올라온다. 그래, 그렇게라도 좀 움직여야지..
잘 잤어? 벌써 배가 고파?
백신도 맞았는지 안맞았는지 벼룩이 있는지 없는지 뭐가 어찌 된 상황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한 반년이 흘러갔다. 여기서 이렇게 ‘그냥’ 살고 있는 프린세스 할머니는 또 내 다리에 자기 몸을 스윽스윽 비빈다.. 언젠가부터 발에 모기도 아닌 무언가에게 물리기 시작했는 데 정말 극심한 가려움증이 길게도 가고 있기에 저 할머니가 이럴 때마다 그리 달갑지는 않지만, 그래도 배 고픈 것도 잘 느끼고 잠도 잘 자고 하는 그녀를 보면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알았어. 밥이랑 우유 먹자
할매의 피난처가 있는 부엌 옆 작은 공간으로 '쫑쫑쫑쫑'하며 개를 부르듯 불러대면 또 따라온다. 배가 많이 고플 때는 뛰듯이 달려오는데 오늘은 속도가 그저 그렇다. 습식 사료에 건식 사료를 약간 섞어서 주었다. 그 사이 아이 우유를 냉장고에서 꺼내서 뜨거운 물에 약간 중탕을 해 두고, 지하 싱크대에 씻어둔 할매 그릇 하나를 가지고 올라와서 담아서 내어주기가 무섭게 찹찹찹찹 ‘굿 굿 온도도 맛도 아주 좋아용 그렇잖아도 목말랐어용’한다. 물은 입에도 안 대고 정말.. 어휴..
갔다 올게, 밥 먹고 여기서 쉬고 있어. 바람이 너무 불잖아. 알겠지?
그렇게 이제는 진짜 간다고 나오는데, 어라.. 갑자기 비가 후다닥후다닥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니.. 이거 이러다 점심시간이 엄청 늦어지겠는데. 언제 갔다가 언제 오냐..
다시 현관으로 올라가 문을 열고, 아무리 바빠도 신발은 벗고 들어가자.. 우당탕탕.. 계단을 한두 개씩 올라가서 이층에 둔 작은 살구색 우산은 찾아왔다. 비가 많이 내리면 몰라도 이 정도엔 요것이 딱이지. hm에서 세일 때 산 건데 일층에 두지 않아서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있다가 얼마 전 재발견하고선 얼마나 흡족했던지.
그렇게 이제는 끝났다. 몇 시야 도대체.. 하면서 급하게 현관문을 쾅 닫고 신발을 신는 둥 마는 둥하며 정원에 있는 나무 아래에 다시 배를 땅에 묻고 웅크려있는 프린세스 할머니를 발견한다.
아.. 진짜 뭐냐.. 비바람이 부는 데.. 뭐 하자는 거니.. 다시 너의 작은 집으로 가서 쉬어
눈만 꿈뻑꿈뻑하며 꼼짝도 하지 않다가 또 멋쩍은지 먼산을 쳐다본다.
알았어. 뭔 고집이 저렇게도 쎈지.. 사람 말을 못 알아먹냐.. 아이유..
그렇게 집에서 드디어 나와서 십여 미터를 가다가 갑자기 생각이 난다.
어, 수표책 챙겼나?
내가 이렇게 서둘렀던 것이, 대형수퍼와 수영장을 가기 전에 작년에 하던 영어교실을 이번에도 할지 아이에게 물었을 때 예쓰라는 대답이 나왔기에 그 선생님 수업 채팅방을 다시 확인해 보고 등록일이 내일 까지라는 것을 알고, 오늘 오전에 첫 발걸음을 요기다가 두려고 했었던 이유였다. 12시부터는 아무래도 점심시간을 고려해주고 싶어서 적어도 11시 즈음에는 도착하고 싶었었다. 물론 카드로 해도 되지만 1년 치를 보통 한 번에 내는 시스템이다 보니 장보기와 등록비용이 겹치면 또 언제 한도초과로 난감해질지 뻔하다. 다시 집으로..
이 영어 수업의 경우에는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하는 건데, 솔직히 한국식으로 생각하면, 무슨 애들 장난하는 것도 아니고 사부작사부작 몇 마디하고 오는 것이 다이다. 단어를 외운다거나 시험이나 과제나 이런 것은 상상불가이다. 먼데이 튜즈데이 한번 말해보고, 레드 블루 옐로 원 투 쓰리..발음이나 억양이 정확하지 않은 게 보여도 그냥 물 흐르듯이 내버려두는 듯하다. 아이의 th발음은 여전히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 그래도 아이가 편안해하니 그냥 놀이방 보내듯이 보낸다. 그리고 올해도 그럴 거다. 일단은 지속할 수 있도록
별 시덥지 않은 문장을 계속 잇고 잇다 보니까.. 끝이 없구나..
내일 아침에 아이도 학교 보내고.. 제이도 새벽에 일어나서 툭딱툭딱 설거지를 하는지 사람 잠을 깨우는지 모를 나름 열심히 뭔가를 할 것이기에.. 늦게 또 자는 듯 깬 듯 반반 밤을 보내고 나면 어찌나 힘든 하루로 긴 시간을 잇고 잇고 해야 할지 모른다.
비가 왔다가 그쳤다가 바람이 불어서 비를 몰고 갔다고 몰고 왔다가 스펙타클한 하늘 사정이 있었고, 그 안에서 나는 또 이 하루를 이어냈다.
저녁에는 까르푸에서 사 온 돼지 꼬리와 돼지 발부분을 ‘벨기에 10.5% abv 맥주 한 캔, 생강 아주 크게 세 조각과 통후추 한웅큼’과 함께 사오십분 푹 고아서 첫물을 아깝지만 확 부어 버리고, 삶은 꼬리와 족발 일 킬로를 퉁퉁 조각 좀 내서 다시 냄비에 넣고 '파우더 커피 두어 스푼+ 콜라 오백미리+ 간장+ 설탕 물엿 등등'을 넣어서 졸였다. 나는 고도수맥주, 커피, 콜라를 거의 마시지 않는다. 저 세 개는 제이가 거의 입에 달고 살다시피 하는 것들이다. 맛있게 먹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 너무 달고 짜고 뭔가.. 다시는 힘들게 해 먹고 싶지는 않다. 물론 콜라겐 폭탄 돼지껍데기와 돼지꼬리 사이사이에 박혀있는 고기살은 꿀맛이다. 하지만 쏘스가 없이도 일차 삶고 나서 먹어본 그 맛이 오히려 내 입맛에 맞았다.
저 벨기에 10.5% abv 맥주. 이 은색 캔은 어제 정원 나무 밑에서 찾았다. 아무래도 마시려고 가지고 나갔다가 잊어버린 듯하다. 흙 위에 소나무에서 떨어진 솔잎이 가득한 거기에 무슨 눈사람 마냥 그렇게 휑하니 서있었다. 다행히 9월 1일부터는 아침저녁으로 꽤 쌀쌀하다 보니, 맥주캔을 무슨 보물찾기 마냥 찾아서 손에 잡았을 때 마치 냉장고에서 방금 꺼낸 듯 시원했다. 이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뭐라고 해야 할지.. 원래는 내가 음식 할 때 쓰려고 고이 숨겨둔, 어디선가 받은 소주 한 병을 꺼내서 돼지 잡내를 제거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찾아도 없어서, 화가 나려던 찰나, 내가 정원에서 찾은 저 맥주를 냉장고 신선칸에 넣고 그 위에 사과와 애호박 등으로 덮어두었던 것이 생각이 나서 그냥저냥 잘 사용했다. 어쩌면 오히려 맥주 거품이 확 올라오면서 볼거리도 있었고 끓이는 데 뽀글뽀글 뽀글 계속해서 산소방울 같은 것이 계속 생겨서 신기하기도 했다. 어쨌든 저 인간이 내 쏘주를 어찌어찌 찾아서 싹 다 마셔버리는 바람에 맥주로도 잡내를 제거할 수 있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었다. 고맙다. 무척.
오늘 저녁은 저 돼지꼬리족발을 앙트레라고 내어 놓았더니, 둘 다 '엥 이것이?' 하며 흥미로워했고, 그렇게 우리 모두는 새로운 미각 경험을 했다. 전식 후에는 스파게티 시판소스를 내가 짜장면 만들 때 애용하는 파스타인 linguine 링귀니랑 해서 내었다. 돼지꼬리족발에 너무 에너지를 쏟아서 도저히 토마토를 삶아서 껍질을 벗기고 마늘 양파 허브 어쩌고 저쩌고....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냥 라면 먹는다 생각하고 조금만 먹으려고 했는데 아이와 저 인간이 예상외로 흡입 속도가 빠르다. 그래. 뭘 먹든 간에 좋다고 생각하고 먹으면 좋은 거야. 이런들 어떠하리 저런들 어떠하리
내일 저녁은 La côte de boeuf를 구워서 내고 싶기는 한데.. 냉장고에 닭다리가 대기 중이네.. 내일 일은 내일 생각하기로 하자.. 벌써 또 시간이 이렇게 되었네.. 그래도 내일 일어나서 해야 할 일들이 있으니, 눈을 떠야 하는 이유가 있으니..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