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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고양이 Aug 10. 2020

새로이 나아가는 '서울국제대안영상페스티벌'

인권, 젠더, 예술 감수성을 껴안고 한 걸음 앞으로

처음으로 상업영화가 아닌 독립영화를 접한 건 고등학교 1학년 때의 일이다. 그때 한참 정유미 배우에 빠져있던 터라, 배우의 필모그래피를 뒤져보다 <폴라로이드 작동법(2004)>를 발견했고 어찌어찌 인터넷에 검색하여 찾아보았다. 누군가 블로그에 올려둔 영상을 저화질로 보게 되었는데 전까지 익숙해져 있었던 상업영화와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와 영상이 전하는 간질간질한 느낌, 무엇보다 10분이 채 되지 않는 짧은 러닝타임이 너무 좋았다.


영화 예술을 사랑하는 나였지만, 대입에 매진해야 할 한국의 고등학생이 한 시간 반에서 두 시간 남짓한 시간을 영화 감상에 할애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독립 영화=짧은 영화라는 공식이 머릿속에 자리 잡았고, 그때부터 구글과 유튜브를 검색해가며 국내 독립/단편영화들을 하나둘씩 섭렵해나갔다. 그러다 지금은 완전히 팬이 돼버린 구교환 감독(배우)도 알게 되었고 독립영화가 단지 짧은 영화가 아닌, 자본주의의 틀 안에서만 어필하는 상업영화가 담지 못하는 목소리를 담는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영상, 영화가 전하는 메시지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 강력한 파급력을 지닌다. 시청각 요소가 결합하고 편집의 힘으로 지루한 틈을 주지 않는 영상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그 어떤 매체보다 생생한 메시지를 건넨다. 따라서 철저히 자본에 따라 굴러가는 상영관에서 벗어나 저마다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담아낸 영상예술 작품들은 더욱 주목받아 마땅하다. 고등학교 시절 단편 영화들을 인터넷 상에서 하나둘씩 찾아보면서 가장 한탄했던 부분은, 이 작품들을 스크린에서 마주할 기회가 사실상 전혀 없다는 현실이었다.


그렇기에 지난 20년간 한국의 대안영상예술 작품들을 소개해온 페스티벌, 네마프의 존재가 더욱 소중하게 느껴진다. 네마프는 혐오와 차별, 때로는 보이지 않는 폭력까지 프레임에 옮겨 담아 더 나은 세상을 위한 대안을 제시해온 영상예술작품들을 소개하고 공론 장을 만들어 왔다. 2000년에 시작해 올해로 벌써 20회를 맞이하는 네마프는 더 다채로운 가치를 머금고 앞으로의 행보를 이어가기 위해 명칭을  '서울 국제 대안영상 페스티벌'로 바꿨다. 명칭을 새로이 한 맥락과 같이, 올해는 '한국 대안영상예술 어디까지 왔나'는 슬로건으로 지금까지의 발자취를 돌아보고 앞으로의 방향성을 검토하고자 한다.


'한국 대안영상예술 어디까지 왔나'라는 슬로건에는 2000년부터 2020년까지 작품에 체현된 한국의 모습을 톺아보겠다는 문화연구적 의미도 포함된다. 한국 사회의 모습은 2000년 이래로 그 어느 때보다 더 빠르게 변화해왔다. 특히나 인권, 젠더, 예술 감수성은 전과 달리 우리의 일상 속에 깊숙이 뿌리내리고 있다. 불과 2-3년 전의 개그 프로그램이 지금 우리 눈에 불편한 구석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것도 빠른 속도로 타자, 인권, 젠더에 대한 한국 사회의 반응이 성숙해졌기 때문이다.


매년 축제의 장을 열어 신진 미디어아트 작가들과 젊은 영화감독들의 참신한 작품을 발굴해온 이들은 지금까지 2천여 편 이상의 국내외 작품, 1000여 명의 뉴미디어 대안 영화와 미디어아트 작가들을 대중에게 소개했다.



공식 포스터와 트레일러에는 유비호 작가가 참여했다. 유비호 작가는 네마프가 시작된 2000년부터 작가로서의 활동을 시작하고 꾸준히 다양한 미디어아트 영상예술 활동을 이어왔다. 포스터와 트레일어에는 유비호 작가의 2000년 작 <검은 질주>에서 추출한 이미지가 사용되었다. <검은 질주>는 억압적이고 불안한 현재와 다가올 미래 사회에서 벗어나고자 했던 작가로서의 고심을 담아낸 작업이다. 그로부터 20년이 지난 현재, 인류는 예기치 못한 바이러스의 출현으로 새로운 전환을 맞이해야 하는 현실에 처해있다. 때문에 네마프가 공식 포스터에 사용한 <검은 질주>의 이미지는 어느 때보다 현실에 대한 직접성을 갖는다.



네마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작가 회고전에서 이번엔 베트남계 미국인 트린 T. 민하 감독을 소개한다. 네마프의 작가 회고전은 매년 얀 슈 반크 마예르, 알랭 카빌라에, 장 루슈, 이토 타카시&마츠모토 토시오, 마를린 호리스 감독 등 대안영화예술 분야의 거장을 국내 관객들에게 소개해왔다.


트린 T. 민하 감독은 베트남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이주하여 영화감독이자 작가, 캘리포니아 버클리대학교 수사학, 여성학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자신의 본거인 베트남과 제3 세계를 카메라에 담으면서 주체성과 여성주의에 대한 담론, 다큐멘터리와 극영화를 넘나드는 실험적 영상 세계를 구축해왔다. 네마프에서 선보이는 상영작은 <재집합(1982)>, <그녀의 이름은 베트남(1989)>, <4차원(2001)>, <벌거벗은 공간:지속되는 삶(1985)>, <밤의 여로(2004)>, <베트남 잊기(2015> 등 10 편으로 데뷔작부터 최근작까지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다.



트린 T. 민하 감독은 여성들의 삶을 묘사하면서 여성의 지위, 정체성의 추구, 아시아 문화 탐색 등을 혼용하여 보여주기도 하고 아픈 역사 이후에 남은 현실을 담아내 전근대성을 비판하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관객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왔다. 감독의 작품 속에 담긴 사회의 모습을 통해 스크린을 넘어 우리가 걸어온 발자취를 성찰하고 주변에 존재하였지만 주목하지 못했던 목소리들에 귀 기울여 볼 수 있을 것이다.


네마프는 올해의 주제전:<뒷산의 괴물, '같이' 사는 것에 대하여>에서 인간 외 타자에게 시선을 돌려본다. 우리는 지금껏 인간과 비인간, 생명과 생명 없는 것으로 이분법적으로 구분하고 '인간'이라는 한정된 울타리 안에서만 사유해왔던 게 아닐까. 네마프는 인간 아닌 다른 존재를 성찰하는 시간을 통해 세상 속 자신의 위치를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 지금 우리가 취해야 할 태도라고 말한다. 올해의 주제전에서는 인간 중심의 견고한 개념을 해체하는 11편의 작품을 선정해 상영/전시한다.


코로나 19는 예상하지 못한 재난이지만, 이번 달 내내 겪고 있는 이상기후는 지난 몇 세기 동안  인간 중심적 자연 착취 관행의 결과이자 수차례 경고되고 예견되었던 재난이다. 인간 중심의 개념을 전복하는 11편의 작품들을 통해 이전보다 깊이 느끼는 바가 있길 바라며, 더 이상 외면하지 않고 꼿꼿이 고개를 들어 우리가 걸어온 길, 현주소,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 선명하게 생각해볼 수 있기를 바란다.


회고전, 주제전뿐 아니라 경쟁 부문  프로그램, 국제 교류전: 한국-체코 수교 30 주년 특별전. 온라인 상영, 네마프 미디어 아트 포럼까지 다채롭게 기획된 페스티벌은 다각도에서 영상예술의 현주소를 검토하고 생각을 확장해 나갈 장을 마련한다. 관객에게 유의미한 메시지를 건네고 예술로써 울림 있게 감동을 줄 작품들을 한자리에서 만나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벌써부터 설레는 마음이다.


영화는 그 어떤 예술보다 우리에게 가까이 스며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상 편파적인 거대 자본이 구축해놓은 시스템 안에서 한정적으로 접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와야 할 작품을 귀히 선정하여 축제의 장을 꾸린 2020 네마프 (서울 국제 대안영상 페스티벌)에서 국내외 역량 있는 작가들의 참신한 작품들을 접하길 기대해 본다.


(트레일러)

https://www.youtube.com/watch?v=IxkseRtLBHw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49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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