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북을 앞에 두고 앉아 이제 글을 써야지, 할 때면 먼저 유튜브에 들어간다. 딴 길로 세려는 게 아니라 노래를 들어줘야 집중이 잘 된달까.. 뇌파가 글쓰기에 맞춰진달까 하는 게 있기 때문이다. 어떤 노래를 들을지 선곡하는 과정이 좀 까다로운데, 적당히 잔잔하면서도 재생시간이 길어야 하고 또 귀에 때려 박히는 가사보단 향기처럼 공기를 타고 가는 류의 가사여야 한다. 무엇보다 내 취향에 꼭 맞아야 하고... 아무튼, 나는 지금 음유시인이 노래하는 자장가를 듣고 있다. 정말 오래간만에 계속해서 듣고 싶은 목소리를 만난 거라 좀 신나고 들떴다. 아티스트 YEJO YEON의 Straner. lover 다.
YEJI YEON은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만났다.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2020 온라인'에서. 온라인 페스티벌에 대한 기대가 큰 상태로 패키지를 배송받았고, '현실에서 관객이었던 내가 이 세계에선 주인공?!'이라 적힌 팜플랫을 열었다. 이세계로 넘어가 주인공이 되는 설정이라니! 귀엽고 재밌잖아? 게임을 다운로드하고선 주인공 캐릭터의 모습을 자유롭게 바꿀 수 있었는데 현실의 나와는 전혀 다른 외향 -핑크브릿지 머리에다가 수영복을 입은 차림-으로 설정하고는 만족스럽게 이세계로 입성했다.
프린지 인디스트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NPC한테 작가를 소개받았다. 그게 YEJI YEON이다. 페스티벌이 열리는 일주일간의 기간 동안 얼마든지 다시 볼 수 있다는 게 온라인 페스티벌의 최대 장점 아니겠는가? 한정된 시간 동안 최대한 많은 작품을 머금고 싶다는 생각에 노트북을 열 때마다 페스티벌에 접속해 공연 영상을 보고, 백그라운드 뮤직처럼 틀어도 놓고 그랬다. 오프라인이었다면 또 보고 싶다고 해서 저기 아티스트님, 그 부분 한 번만 다시 연주해 주시죠,, 할 순 없지 않은가? 생각만 해도 무례하다.
이세계에서 열리는 페스티벌
기왕에 온라인으로 감상하는 거, 현장감이 떨어지고 아티스트와의 대면을 못하고 등의 어쩔 수 없는 한계에 안타까워하기보단 내가 취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장점을 취하기로 마음먹었다. 퍼포먼스, 시각예술, 현대무용, 음악, 연극, 음악극 등등 짧게는 10분 길게는 1시간을 넘는 작품들을 제대로 머금기 위해선 무엇보다 시간이 필요하다. 게임 속에서 걸어 다니고, NPC와 대화 비슷한 걸 나누기도 하면서 보고 싶은 작품을 고른다. 마스크도, 거리두기도 필요하지 않은 이곳에선 어떤 때보다 느긋하게 작품에 몰입할 수 있다.
연극이나 현대무용에 익숙하지 않은 나였기에 모든 작품을 제대로 이해하고 향유했다고 자신할 순 없다. 어떠한 메시지를 전하려는 움직임인지 직관적으로 해석하지 못해 고개를 갸우뚱한 작품도 있다. 그럼에도 기억에 남는 강렬한 움직임들이 분명히 있고 꽤나 짙은 잔상이 남았다. 아마 이런 식으로 익숙하지 않은 예술 언어에 적응해가는 것이라 생각한다. 그런 면에서 봤던 작품을 다시 보고 시간을 들여 향유하는 일주일 간의 온라인 페스티벌은 나에게 있어 학습의 시간이었다고도 생각이 든다.
우리가 처한 현실, 그리고 미래
리플렉션의 <빠다고 번역기>는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 절망을 이야기한다. '코로나 19가 종식되었습니다, 모두 마스크를 벗어주세요'라는 내레이션과 경쾌한 탬포의 음악이 어우러져 낙관적인 전망을 그린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작품 설명을 일고, 다시 봤다. '각국의 언어들을 몸으로 번역한다. 한국어의 텍스트를 읽고 이를 빠다고 번역기를 이용해 여러 언어와 함께 움직임으로 번역한다. 번역기의 해석이 같은 의미라고 믿고 있지만, 제대로 번역되고 있다고 믿었던 이 AI번역기는 당신을 기만하고 있지는 않을까?'
코로나 19의 종식, 모두가 바라고 그리는 일이다. 하지만 그 이후의 삶이 이전과 같을 것이라 예측할 순 없다. 우리는 이미 언택트 시대에 살고 있었다. 코로나로 전 세계가 팬대믹에 빠지기 한참 전부터 말이다. 온라인, 가상현실, 인공지능, 빅데이터는 그래서 종종 두려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단적인 예로, 알파고. 하지만 모든 게 온라인 상에서 이뤄지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선 이 친구들 덕분에 삶이 정상적으로 굴러갈 수 있게 되었으니 좋든 싫든 크게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우리가 믿었던 AI 번역기가 사실은 우리를 기만하고 있던 건 아닐까 하는 물음은 여러 가지를 내포한다. 리플렉션은 '번역'이라는 소재로 상징적으로 풀어냈는데 빅데이터에 얼굴을 내어주고 인공지능에 의존하는 걸 경계해야 하지 않을까? 인스타그램 스토리에서 요즘 유행하는 게 있다. 뮤직비디오 속 아이돌의 얼굴에 내 얼굴을 합성하는 것. 해봤다면 그게 얼마나 간단한지 알것인다. 그저 셀카 모드로 자신의 얼굴을 촬영하기만 하면 된다. 근데 이거, 딥 페이크 기술임을, 인공지능 포르노로 지속적인 문제를 일으키는 기술임을 자각하는 자는 별로 없는 것 같다.
리플렉션 지구 생태위기, 전염병, 인공지능, 사이버 윤리 등의 문제는 복합적으로 얽혀 서로가 서로를 심화하는 형상임을 몸으로 이야기한다.
괜찮지 않음에 대하여
20분짜리 춤 연극, 탄츠라움의 <파인에프>에 등장하는 남자는 자꾸만 의자에서 떨어진다. 넘어지고 다친다. 자기를 파괴하는 행위임에도 숨 돌릴 틈 없이 다른 의자에 가서 앉고, 역시나 넘어지고 다친다. 그는 우리를 향해, 또는 세상을 향해 계속해서 괜찮아요! 를 외친다. 이내 등장한 여자도 마찬가지다. 넘어지고, 다치고, 괜찮아요!.
둘의 춤을 보면서 괜찮지 않음에 대해 생각했다. 매일이 결정이고 매 순간이 시험대인 현대사회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의자에 앉기 위해 다치기를 반복할까? 그 의자가 고장 난 의자임을 안다고 해서 의자 찾기를 멈추고 두 발로 서있기를 선택할 수 있을까? 올 한 해는 특히나 많이 다쳤다. 취업문이 막힌 청년들, 회사를 폐업한 사장님들, 재계약 전망이 없는 계약직 노동자들, 그리고 문을 닫은 수많은 가게들. 괜찮지 않은 사람들에게,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는 말은 너무하다.
그리고 다시, YEJI YEON의 <Stranger, lover>를 듣는다. 사랑을 노래하는 사람의 목소리는 감미롭다. 가사에 귀 기울이지 않아도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들린다. 당신은 사랑스러워요, 당신은 진실되었어요, 당신은 아름다워요...
가끔은 넉넉한 수필 같은 말보다 부드럽게 진행되는 기타 코드가, 얼굴 표정이, 움직임이, 춤이 마음에 가까운 치유로 다가온다. 마음에 가까운 경고로 다가오기도 하고 말이다. 서울 프린지 페스티벌 온라인에서 그런 작품들을 만났다. 만나서 반가웠고 다시 볼 땐 더 좋았다. 일상에 스민 예술과 함께, 떠들썩하진 않아도 울림 있는 일주일간의 페스티벌을 다녀왔다.
일자
오프라인 08.13~08.23
(월, 화, 수 공연 없음)
온라인 08.24~08.31
장소
문화비축기지
티켓가격
온라인/오프라인 티켓
각 25,000원
(티켓 모두 구매시 40,000원)
주최
프린지페스티벌 사무국
서울프린지네트워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