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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고양이 Oct 15. 2020

강아지 산책, 이번 주는 미술관으로 가볼까요

국립현대미술관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반려인과 반려동물이 함께 할 수 있는 공간은 어디까지일까. 인간이 장을 볼 때 개는 입구 밖 기둥에 묶여 기다린다. 인간이 식탁에 앉아 밥을 먹을 때 개는 식탁 아래에서 낑낑거린다. 인간이 인테리어를 위해 고른 대리석 바닥 위에서 개의 발바닥은 자꾸 미끄러진다. 우리는 아무렇지 않게 '반려'라는 단어를 가져다 쓰면서도, 진정한 반려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본 적이 있던가?


노트북 앞에 앉아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이 순간에도 우리 집 강아지 밍키는 내 발 옆에 딱 달라붙어 목이 빠져라 나를 올려다본다. 반려인이라면 모두 이 가련한 시선을 익숙하게 받아봤으리라. 작은 강아지의 세상은 주인으로 꽉 차있다. 내가 챙기지 않으면 스스로 배를 채울 수 없는 이 작은 생명체에 대한 책임감에 때때로 마음이 무겁기도 하다. 애완동물이 아닌 반려동물이라 칭하지만, 인간의 영역과 개의 영역은 확실히 분리되어있다. 공원에 함께 갈 순 있어도 식당에 함께 들어갈 순 없다.


반려견과 어디든 함께 할 수 있다면 좋을 텐데, 내가 인간의 영역으로 가있을 동안 홀로 있지 않아도 되도록 반려동물 출입을 허용하는 곳이 많아지면 좋을 텐데. 인간의 즐거움을 위해 사육한다는 애완동물의 개념이 낡은 것이 되고 반려자처럼 대우해야 한다는 생각이 짙어지면서 반려인과 반려동물이 함께 할 수 있는 시설이 각광받고 또 많이 생기는 추세다. 하지만 그곳이 미술관이라면? 미술관에서 개를 위한 전시를 한다면 어떨까?



국립현대미술관이 특별 기획한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은 말 그대로 개를 위한 전시다. 개들이 지각할 수 있는 색을 사용하고, 눈높이도 개에게 맞춘다. 실내에 들어가기 전에 먼저 볼일을 볼 수 있도록 개를 위한 야외 공간이 마련되어있다. <개를 위한 미술관> 이라니. 실제로 이 공간에 들어온 개들이 예술을 감상하고 무언가를 느낄 수 있을까 하는 질문엔 아무도 답을 할 수 없다.


그러니 개를 위한 미술관이라는 말은 곱씹어볼 필요가 있다. 이게 정말 개를 위한 기획이 맞나? 결국엔 반려동물과 이런저런 체험을 해보고 싶은 인간을 위한 이벤트 아닌가? <모두를 위한>에서 '모두'에 개가 들어갈 수 있나? 포털 사이트의 댓글을 보면 세금을 걷어다 이런 데 써도 되는 거냐 하는 비판의 목소리도 보인다.


이 전시가 이런저런 반응을 일으키는 건 다양하다. 인간이 아닌 개를 미술관 안으로 끌어들이는 기획은 이전까지는 없던 파격적인 시도다. 우선 사람들이 웅성이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이 기획은 의도한 바를 이룬 게 아닐까 생각한다. 반려동물과 여러 가지 체험을 해보고 싶었던 사람에게는 긍정적인 시그널로 받아들여졌을 것이고, 요즘같은 시국에 공공기관이 개를 위한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준비했다는 것에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도 이해가 된다. 그런 와중에 우리는 개들이 넘나드는 미술관을 보며 '모두'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볼 것이다. 지금까지 무척이나 인간 중심으로 살아온 우리는 이제 비인간(non-human)에 대해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철저히 인간 중심적으로 구성된 사회. 육류 중심의 식생활과 그로 인한 공장식 축산의 가속화. 그로 인한 전염병, 그로 인한 살처분을 생각한다. 온실가스 배출, 코로나 바이러스로 다시금 높아진 일회용품 사용률, 동물에게 올가미가 된 마스크, 그로 인해 고통받는 수많은 인간 아닌 존재들을 생각한다. 오늘 아침, 단풍철 아프리카 돼지열병 차단방역을 위해 등산을 자제하라는 재난문자를 받았다.


작년 가을 아프리카 돼지열병에 3만 4천 마리의 돼지가 땅에 묻혔다. 따듯한 내 발 옆에 꼭 달라붙어 편하게 자리 잡는 우리 강아지보다, 차가운 땅에 떨어진 그 돼지들의 지능이 더 높다는 걸 알았다. 소, 닭, 돼지도 편하고 따듯한 곳을 좋아하고 어둡고 좁은 곳은 무섭다.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한다. 밍키에게 오리고기 간식을 주는 나는 뭐지? 내가 밍키를 키우는 것도 결국엔 귀여운 걸 갖고 싶다 하는 이기적이고 탐욕스러운 인간 중심적 이기심 때문 아닐까?  누구를 위한 반려인가?

대표적인 공공기관이자 지극히 인간만을 위한 공간인 미술관이 개를 실질적 손님으로 초대하는 걸 보면서 현대사회에서 반려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본다. 인간과 반려동물의 관계를 생각하는 건 곧 나와 타자의 관계를 생각하는 것으로 연결된다. 사회에서의 타자에 대한 태도는 어떠했는지, 미술관이 담보하는 공공성의 범위는 어디까지일지,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은 매우 배타적인 개념은 아니었는지.


고양이를 집에 들이기 시작하면서 비건 지향 생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본 적 있다. 조금이라도 따듯한 전기장판 쪽으로 몸을 뉘이려는 걸 보며 인간과 다를 바 없는 비인간의 행복과 고통을 민감하게 감지하게 되었다고 한다. 인간 아닌 생명체에 대해 품게 된 애정과 책임감은 이내 넓은 범위로 확장되었고, 반응하는 능력인 responsibily(response+ability) 책임감이 단단해졌으리라. 신념과 생활을 일치시키고자 스스로를 비건으로 정체화했다는 이야기에 마음이 뭉클했다.


개의 눈높이에 맞춰 구성된 미술관에서 낯선 불편함을 느끼며 지금껏 우리의 편의를 위한 공간이 얼마나 이기적이었는지 떠올려 본다. 나 아닌 주변의 것에 진지한 태도로 관심을 기울이는 건 내가 아닌 위치에 서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이번 주에는 항상 가던 공원 말고 강아지와 함께 국립현대미술관에 가보는 거 어떨까. <모두를 위한 미술관, 개를 위한 미술관> 은 반려인과 개에게 재미를 주는 일회성 이벤트에 그치지 않을 것이다. 타자를 진실하게 대하며 '소중한 타자성'에 대해 생각하는, 앞으로 인간이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는 공공의 장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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