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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파란고양이 Oct 07. 2021

Peppermint

한국 최고의 사주카페에서 8천원짜리 페퍼민트 티를

카페에서 차를 마시는 건 어느정도 절제와 고상함이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커피를 주문하는 건 중독과 관성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시원한 커피라는 가능성을 눈 앞에 두고 굳이 따듯한 차 종류를 고르는 건 쉽지 않다. 저녁에는 카페인 섭취를 자제해야 하기 때문에, 미세먼지 때문에 목이 좀 칼칼해서, 이 시간에 찬 걸 마시면 배가 아플까 봐 등등 차를 마시는 이유는 하나같이 자신의 몸을 보살피기 위함인 것 같다. 가끔 카페에서 커피가 아닌 페퍼민트, 캐모마일 차를 호호 불며 마실 때, 나는 내가 어른에 가까워지고 있음을 목구멍으로 느낀다.



오늘은 두시면 끝나는 수업이 하나 있어서, 세시 반에 헤민이랑 만나는 약속을 잡았다. 두 시 정도에 수업이 끝나는 날이 좋다. 낮 시간과 오후 시간이 분리되고, 분리됨으로써 존재하게 되고, 쓸 수 있게 되니까 말이다. 발목이 드러나게 청바지 밑단을 둥둥 걷어 올리고, 바스락 소리를 내는 얇은 트렌치코트를 걸쳤다. 일년 만에 꺼내 입은 트렌치코트에서는 봄의 냄새가 났다. 벌써 조금 걸으면 등에 땀이 배는 날씨다. 크로스백 안에는 어제 알라딘에서 산 하루키의 ‘회전목마의 데드히트’ 를 챙겨 넣었다. 어제 밤에 거의 다 읽어서 마지막 서른 페이지 정도만이 남아있을 뿐이었지만, 누군가와 둘이서 만나는 약속을 잡으면 상대를 기다려야 할 시간을 대비해 읽을 거리를 챙기는 편이 좋다.



우리는 서울 옥션에서 열리는 전시를 보기로 한 것인데, 내가 좀 일찍 도착해서 건물 1층에 적당히 앉아 가방에서 책을 꺼냈다. 예전에는 약속장소에 먼저 도착해서 기다리는 걸 싫어했다. 모두가 각자의 목적지로 야무지게 이동하고 있는 와중에 혼자 일시정지 상태로 머무르고 있는 게 눈에 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는 사람들이 타인의 일시정지를 알아차릴 만큼 배경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기다리는 시간이 어색하지도 않다. 다만 그 시간 동안에 지루하지 않을 수 있도록 읽을 거리가 필요할 뿐이다.



헤민이는 늦은 것에 대해 아주 미안해 하며 건물로 들어왔다. 유리창 너머로 총총 가까워 지는 모습이 눈에 들어올 때부터 늦은 것에 대해 곤란해 하는게 너무 잘 보여서, 오히려 내가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며칠 전에도 봤었기에 비교적 담백하게 인사를 나누고 바로 지하에 있는 전시 공간으로 내려갔다. 귀엽고 알록달록한 꽃 그림, 마찬가지로 알록다록한 차림의 사람들. 전시 공간이 크지 않아 짧게 관람을 마무리하고 야무지게 기념품이라 할 수 있을 만한 종이 꽃다발도 샀다.


둘 다 너무 배가 고파서, 가까운 거리에 있는 딤섬집을 지도에 찍고 건물에서 나왔다. 널찍한 차도와 낮은 아파트 건물 위로 빈틈없이 햇빛이 닿는 압구정 거리. 이곳 사람들은 하나같이 좋은 향이 나고 세련된 차림인데다 서두르는 법이 없다. 우리가 도착한 딤섬집도 마찬가지로 세련되었고, 서두르는 법이 없었다. 


우리는 샤오룽바오와 가지요리, 그리고 계란면요리를 시켰고 기다리는 동안 끊임없이 이런 저런 얘기를 했는데 별로 기억나는 건 없다. 차례로 메뉴가 나오고 먹기 시작하면서 각 메뉴에 관해 나눈 토막토막의 말들은 기억난다. 가지요리의 눅진함과 적절하게 어울리는 땅콩에 대한 얘기, 혜민의 동생이 엄청나게 괴랄하고 맛있는 가지요리를 할 수 있다는 얘기, 계란면이 고소하다는 말, 샤오룽바오를 숟가락에 올리고 젖가락으로 옆구리를 살짝 열어 따끈따끈한 탕즙으로 입술을 축이며 만족스럽게 주고받은 눈빛…


음식이 잔뜩 나온 탓에 우리는 충분히 배가 부르고도 계속 먹을 게 남아 있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식사를 할 때 이런 상황이 좋다. 접시가 비지 않아 배를 채우고도 계속 앉아 얘기 나누는 게 자연스럽게 되는 것. 식사를 하러 들어간 식당에서 주문한 요리의 양은 사실 그곳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의 양이 아닐까? 줄지 않는 계란면을 꾸준히 집어먹으며 우리의 대화 주제는 사주풀이로 튀었다.


-여기 주변에 사주 유명한 곳 있지 않을까? 압구정이니까 뭔가 많을 것 같은데, 여기 연예인도 많이 오고!


-나 사실 얼마전에 사주 봤는데 태어난 시간 잘못 말해서 남의 사주 듣고 왔다. 다시 보러 가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지금 갈래?


다음 지도를 켜보니 주변에 널린 게 사주 카페였다. 그 중에서 ‘한국 최고의 사주카페’라는 카피를 달고 있는 한 곳을 골라 목적지로 찍고 일어났다.


전체운을 봐주는 타로 2만원, 사주 2만원, 신내림 받고 하신다는 신점은 3만원. 그리고 1인 1음료 주문이 필수? 아, 다시 보니 여기 사주 ‘카페’ 다. 가격표를 보니 콜라 사이다가 7천원, 커피 종류도 비슷하고, 따듯한 차는 일괄 8천원이었다. 아, 이곳은 음료 값이 사주풀이 가격에 포함되어 있는 거구나...! 시간이 늦었고, 오는 길이 살짝 쌀쌀했기에 아이스라떼를 주문하려는 관성을 누르고 따듯한 페퍼민트를 시켰다. 주렁주렁 피어싱을 단 알바생은 종이컵에 티백 하나를 띄워 가져왔고 나는 두 손으로 그 비싸고 저렴한 일회용 컵을 쥔 채, 한복을 입은 선생님 앞으로 가 앉아 사주풀이를 듣기 시작했다.


사주를 볼 때 좋은 점은 내가 아직 점지해 볼 수 있는 미래가 잔뜩 남아있다는 사실을 상기하게 된다는 데에 있다. 사주 선생님은 능숙한 솜씨로 나의 인생을 몇 개의 토막으로 쪼갠 뒤 각 시기에 만날 대운과 불운 같은 것들을 족집게 강사처럼 짚어줬다. 나는 앞으로 맞춰보면 될 미래의 시간들을 생각하며 두근두근 했다. 선생님 말 대로면 나는 사업가나 예술가, 여행자, 또는 작가가 될 터였고 사주에 낀 역마살 탓에 해외에 나가 살 수도, 외국인 남편을 만날 수도 있었다. 선생님은 내 리액션에 따라 능수능란하게 조미료를 첨가했다가 뺐다가 했기에 미래의 내 모습은 자꾸 버전이 추가되었다.


고작 커피 대신 차를 시켜 마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해서 스스로를 성숙했다고 하기엔, 난 아직 많이 어리고, 덕분에 너른 가능성의 세계에 서 있를 수 있다. 사주풀이가 막판 큐엔에이 타임으로 접어드는 사이 얼마 마시지 못한 페퍼민트 티는 거의 식어버렸다. 세월이 흘러 이미 '누군가'가 된 미래의 나이 많은 내가 이 글을 읽으면 질투할 수도 있겠으나, 나는 아직 가능성이 차단되지 않은 지금이, 젊음이 좋다. 아무것도 될 수 없을 것 같으면서 동시에 무엇이든 될 수 있을 것 같은 희망찬 불안. 가능성이라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청춘은, 너무 산뜻하고 또 귀하다. 그리고 페퍼민트 티를 반 이상 남겨 버린 걸 보면 나는 역시 얼음이 달그락 거리는 아이스 라떼를 마시는게 디폴트인, 청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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