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사람 실종사건
먼저 눈덩이를 단단히 뭉치지 않으면 크고 둥그런 눈사람의 몸통을 만들 수 없다. 나는 서툴게 눈을 모으고 되는대로 두드렸다가 금새 모양이 깨어지고 마는, 몇 번의 실패 끝에 눈사람 생성의 법칙을 터득했다. 우선은 작고 주먹만한 눈을 꾹꾹 눌러 뭉친다. 주먹밥 주무르듯이. 그렇게 만들어진 주먹만한 눈덩이가 주먹덩이다. 이는 일종의 결집체인데, 여기에 촉촉한 함박눈이 쉽게 붙고 크기가 커질수록 몸을 불리는게 수월해져 바닥에 놓고 굴릴만한 크기가 된다. 굴러다니기 시작한 주먹덩이는 금새 무릎까지 올라오는 크기가 되고, 크기가 커질수록 굴리기 쉬워져 더 빨리 둥글둥글한 모양이 된다. 플스로 카타마리 게임을 하던 경험을 살려 눈이 폭삭하게 쌓인 구성탱이를 위주로 공략하다보면 어느새 내 눈덩이가 가장 크다.
아파트에서 오소소 몰려 나온 아이들이 고만 고만한 눈덩이를 토닥일 때, 그 사이에서 나의 눈덩이는 군계일학이다. 어린 아이들은 부러 크게 말해서 자기네 하는 이야기를 그 이야기의 대상이 듣도록 하는 특유의 발화법을 구사하기 때문에 저 사람 눈사람은 엄~청 크다! 어디? 그렇지? 그렇네~ 어떻게 하면 저렇게 커다랗게 해가지구 막 굴리고 막 그렇게 할 수 있는거지?하며 조러조러 말하는게 잘도 들려왔다. 순간 비식 웃음이 나왔는데 혼자 나와서 이러고 있는 자신이 웃기기도 하고 그와 반대로 무척이나 즐거워서, 내친김에 쟤들이랑 눈싸움까지 하고 싶고 스물네살 먹고도 놀이터에서 애들이랑 눈덩이나 굴리고 그것에 열중하는게 젤 좋고 재미있구나 해서 웃었다.
나중엔 동생도 합류했다. 동료가 생기니 웃음을 숨길 필요가 없어져 팍팍 웃었다. 소박하게 눈 쌓인 부분이 이미 어느 정도 사람들 신발 바닥에 뭉게져 사라졌기 때문에, 동생이 만든 눈사람 머리는 몸에 비해 작았다. 소두 눈사람은 귀염성은 떨어져도 나름대로 사뜻한 멋이 있는 것 같아 이정도면 되었다, 하고 몸통 위에 머리를 올렸다. 물기가 좀 있으면 더 잘 붙을텐데 어째 머리가 자꾸 데구루루 떨어져서 목 부분에 눈을 덧대고 단단히 결합시키느라 둘이 합심을 좀 했다. 눈을 퍼다가 머리와 몸 사이의 틈에 붙이고 꼬짝꼬짝 누른다. 손은 시리고 눈사람은 제법 근사하다. 즐겁다. 계속 눈이 왔으면 좋겠다. 챙겨온 머리띠를 씌우고 나뭇가지를 박아 세워 팔을 만든 다음 빨간 장갑까지 끼워 눈사람1 완성이다. 송씨들이 만들었으니 눈송송이다.
눈송송이는 추정컨데 10시간 정도 존재하고 사라졌다. 밤에 태어나서 아침에 죽은 셈이다. 눈송송이 양 옆에 나란히 만들어졌던 다른 아이들의 눈사람2, 눈사람3은 그대로였는데. 눈송송이가 가운데에 떡하니 서서 주인공처럼 보이고 빨간 머리띠까지 하고 있어서 그랬나, 아니 그냥. 커서 때리기도 쉽고 부서질 때 재미도 더 있으니까, 그러니까 머리를 먼저 때리고 떨어진 머리를 발로 뭉게고 커다란 몸통을 발차기로 깨뜨리고 나면 스트레스도 확 풀리고 웃음이 팍 나니까. 대부분의 눈사람은 녹아서 죽지 않고 깨어져 죽는다. 사라짐을 예견하여 사진으로 남겨두길 잘하였다.
눈사람을 만들고 노는 사람과 눈사람을 깨뜨리고 노는 사람은 뭐가 다를까. 남이 만든 눈사람을 원펀치로 날려버리고 깔깔거리는 행위에 대해, 그 안에 내재한 폭력성을 근거로 비난하고 싶으면서도 원래 만드는 일보다 파괴하는 일이 더 쉽고 확실한 쾌락이지 않나, 생각하면 만들기나 깨뜨리기 모두 겨울 놀이고 어차피 재미있자고 노는 거니까 어쩔 수 없는 건가하는 두루뭉술한 결론까지 가버리고 만다. 그렇다고 내가 결국엔 부수려고, 그런 류의 파괴본능을 품고 커다랗게 눈덩이를 굴린건 결코 아니다. 그저 완성에 몰두했을 뿐이었다. 그치만 눈송송이가 있던 자리에 덩그러니 남겨진 장갑 두 짝과 깨진 주먹덩이의 흔적같은 걸 가만히 보니, 깨부술 때 재미있었나, 하는 생각이 문득 들어 상실감 위에 억울함이라는 묘한 감정이 한 겹 올려진 것이다.
그럼에도, 내가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는 건 변하지 않는다. 몸을 움직이고 웃는 건 가만히 앉아 엄지 손가락만 까딱거리며 타인의 세상을 넘겨 보는 것과는 비교도 안되게 생동감 넘치는 즐거움임을, 적당히 상기하며 나름대로 만족스러운 아침이다. 그리고 동생에게 쪼르르 전화해서는 눈송송이가 없어졌고 어쩌구 얘기했는데 동생은 나보다 더 호들갑을 떨며 눈사람 실종사건이라며, 밍키 탐정이 전담하여 수사에 착수하기로 했고 산책 시 사건 현장의 냄새 분자를 추적하여 눈송송이를 찾을 수 있을거라고 했다. 눈사람 실종사건이라니, 사망사건이나 살인사건보다 나은 듯 하여 구태여 누군가 우리 눈송송이를 일부러 부쉈다고, 깨진 몸통이 나뒹굴고 있다고 덧붙이지 않고 밍키 탐정 책임이 막중하네 어쩌구하며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