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서치(借書癡)
차서치(借書癡), 책 앞에서 소인배가 되는 우리의 초상
차서치(借書癡)라는 말은 우습지만, 웃고 넘기기에는 책의 세계를 너무 정확하게 찌른다. 당나라 이광예(李匡乂)는 《자가집(資暇集)》에서 “借一癡, 借二癡, 索三癡, 還四癡”라고 적었다. 책을 빌려주는 자도 어리석고, 빌리는 자도 어리석고, 빌려준 책을 찾아 나서는 자도 어리석고, 마침내 그 책을 돌려주는 자는 더더욱 어리석다는 것이다. 학문의 세계란 원래 고매한 진리의 전당이어야 하겠지만, 책 앞에만 서면 그곳 역시 속세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 사랑하는 것은 나누라 말하면서도, 막상 책만큼은 품 안에 숨기고 싶어지는 것이 인간 심성의 밑바닥이다.
생각해 보면 책은 돈보다 묘하다. 돈은 빌려주면 언젠가 갚을 셈이라도 하지만, 책은 빌려가는 순간부터 주인이 바뀐 듯한 착각을 낳는다. 읽겠다고 가져간 사람은 자기 서가에 꽂아두는 순간 이미 그 책과 정이 들어버리고, 빌려준 사람은 며칠만 지나도 그 책이 자기 집 어딘가에 여전히 있어야 할 것처럼 느낀다. 그러니 책을 둘러싼 갈등은 단순한 소유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기억의 문제요, 애착의 문제요, 지적 허영의 문제다. “그 책은 내게 꼭 필요한 책”이라는 말은 흔히 절반만 진실이다. 나머지 절반은 “그 책이 네게 있는 것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는 소유의 본능이다.
조선의 학자들도 이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다산 정약용을 떠올리면, 우리는 먼저 한 시대를 압도한 거대한 학문을 생각하지만, 그 거대한 학문 역시 결국은 책을 구하고, 빌리고, 베끼고, 비교하는 지난한 과정 위에 세워졌다. 학문은 고독한 정신의 산물인 동시에, 남의 서가와 남의 호의에 기대는 집단적 작업이다. 그래서 책을 빌려준다는 행위는 어리석음이 아니라, 어쩌면 학문 공동체가 유지되는 마지막 예의인지도 모른다. 빌려준 책을 못 받는 일이 비일비재해도, 그래도 누군가는 또 책을 내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지식은 서가 속에서만 늙어갈 뿐이다.
근대에 오면 이 책의 탐욕은 더욱 노골적이 된다. 육당 최남선은 미망인의 표현대로 “책에 장가든” 사람처럼 살았다. 책을 향한 이 집착은 근대 지식인의 위대함이자 우스꽝스러움이었다. 많이 읽은 사람일수록 더 많이 갖고 싶어 하고, 많이 가진 사람일수록 쉽게 돌려주지 못한다. 책이 단지 읽는 물건이 아니라, 자기 정신의 영토를 넓혀 주는 전리품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장서가의 서재는 교양의 방이면서 동시에 은밀한 점유의 방이기도 하다.
결국 차서치라는 말은 책을 빌려주지 말라는 냉소가 아니다. 오히려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세계가 얼마나 우습고도 애처로운가를 보여 주는 자조에 가깝다. 책은 사람을 넓히지만, 책에 대한 집착은 사람을 옹졸하게 만든다. 우리는 지식을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실은 책의 내용만이 아니라 책이라는 물건 자체를 사랑한다. 그래서 빌려주고도 후회하고, 빌려가고도 미안해하고, 돌려달라 말하면서도 쩨쩨해 보일까 주저한다. 학문과 독서의 세계가 끝내 인간적인 이유는, 그 고상한 세계 한가운데에도 이런 소소한 욕심과 우스운 계산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차서치는 책벌레를 조롱하는 말이 아니다. 책을 사랑한 나머지 끝내 책 앞에서 소인배가 되고 마는, 우리 모두의 초상이다.
그런데 오늘의 현실은 그 자조마저 사치로 만든다. 평생 책을 모으고 아끼며 지식의 성채를 쌓아 온 퇴직 교수들이 이제 그 장서를 폐지값에 넘기는 일이 낯설지 않다. 기증을 원해도 받아줄 곳이 없고, 자녀들은 부모의 서재를 짐으로 여기며, 헌책방조차 연식 든 전공 서적은 거들떠보지 않는다. 도서관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공간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책을 솎아내고, 이용 빈도가 낮다는 이유로 장서를 폐기하는 일이 제도화되었다. 빌려주고 빌리며 이어졌던 지식의 순환이 이제는 저울 위에 올려져 무게로 환산된다. 차서치의 네 가지 어리석음 중에서, 가장 슬픈 어리석음은 다섯 번째인지도 모른다. 평생을 바쳐 모은 책이 끝내 폐지가 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