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명재(明齋) 윤증(尹拯)

노론(老論)과 소론(少論)

by 김희곤

회니시비(懷尼是非): 한 묘갈명(墓碣銘)이 갈라놓은 두 세계


조선 후기 정치사의 깊은 균열 가운데 하나는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분열이다. 그러나 이 분열은 단순한 권력 다툼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학문적 전통과 인간 관계 속에서 형성된 갈등의 결과였다. 그 중심에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과 명재(明齋) 윤증(尹拯)이라는 두 거인이 있다. 두 사람은 본래 스승과 제자의 관계였으나, 결국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결별로 나아가게 된다. 이 결별의 상징적 사건이 바로 회니시비(懷尼是非)이다.


스승과 제자, 그 인연의 시작


윤증(尹拯)은 흔히 기호학파(畿湖學派) 학맥 속 인물로 언급되지만, 직접적으로는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이나 신독재(愼獨齋) 김집(金集)의 문인이 아니었다. 그는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벗이었던 송시열(宋時烈)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윤선거(尹宣擧)는 기호학파(畿湖學派)의 중요한 학자였으며 송시열과 깊은 교유(交遊)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인연 때문에 윤증은 자연스럽게 송시열 문하에서 공부하게 되었고, 한때는 스승을 깊이 존경하는 제자였다.


그러나 두 사람의 관계는 한 사건을 계기로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진다. 그 배경에는 윤증의 부친 윤선거(尹宣擧)의 삶이 자리하고 있다.


강화도(江華島)의 기억


윤선거(尹宣擧)는 병자호란(丙子胡亂) 당시 강화도(江華島)에 있었다. 강화도는 조정과 왕실이 피난해 있던 곳이었고, 조선의 마지막 보루로 여겨지던 곳이었다. 그러나 1637년 강화도(江華島)가 청군(淸軍)에게 함락되면서 많은 선비와 백성들이 절망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윤선거의 부인과 주변 인물들 가운데는 절의(節義)를 지키기 위해 자결한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윤선거(尹宣擧)는 성을 빠져나와 살아남았다.


이 사건은 이후 윤선거의 삶에 깊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는 평생 이 일을 부끄럽게 여기며 벼슬길에서 물러나 은거(隱居) 생활을 하였다. 스스로도 이를 평생의 한(恨)으로 여겼다고 전해진다.


묘갈명(墓碣銘)을 둘러싼 균열


문제는 이 사건을 바라보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시각이었다. 송시열에게 절의(節義)는 목숨보다 중요한 가치였다. 그는 조선 성리학자(性理學者) 가운데서도 가장 강한 명분론(名分論)을 가진 인물이었다. 국가와 군주, 그리고 도덕적 원칙을 위해서는 목숨을 버리는 것조차 마땅하다고 생각하였다. 이런 기준에서 보면 윤선거(尹宣擧)의 강화도(江華島) 처신은 결코 칭송받을 수 없는 일이었다.


윤선거가 세상을 떠난 뒤, 아들 윤증(尹拯)은 스승 송시열에게 부친의 묘갈명(墓碣銘)을 써 달라고 부탁하였다. 묘갈명(墓碣銘)은 단순한 비문(碑文)이 아니라 한 인물의 삶을 후세에 기록하는 중요한 글이었다. 제자로서는 스승의 글이 부친의 명예를 높여 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송시열이 쓴 글 속에는 윤증이 예상하지 못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송시열은 윤선거(尹宣擧)가 강화도(江華島)에서 죽지 않고 살아남은 일을 언급하면서, “박지계(朴知誡)의 권유 때문이라고 하니 그대로 기록한다”는 취지의 내용을 남겼다.


겉으로 보면 사실을 적은 것처럼 보이지만, 윤증의 눈에는 이것이 아버지를 비판하는 말로 읽혔다. 마치 윤선거(尹宣擧)가 스스로의 의지로 절의(節義)를 지킨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권유에 따라 목숨을 구하며 살아남은 것처럼 기록한 것이기 때문이다.


윤증(尹拯)은 여러 차례 송시열에게 글의 수정을 요청하였다. 아버지가 평생 그 일을 부끄러워하며 살았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묘비(墓碑)에 그런 내용이 남는 것은 자식으로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송시열은 끝내 이를 고치지 않았다. 사실(史實)을 왜곡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었다.


신유의리문(辛酉義理問): 제자의 공개적 도전


이 사건은 결국 윤증의 분노를 폭발시키게 된다. 윤증은 스승에게 신유의리문(辛酉義理問)이라는 긴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에서 그는 송시열의 학문과 태도를 정면으로 비판하였다.


그 요지는 대략 이러하였다. 겉으로는 엄격한 도덕(道德)을 말하지만 속으로는 편협하며, 학문(學問)은 높으나 처사(處事)는 지나치게 독단적이라는 것이었다. 이는 단순한 의견 차이가 아니라, 스승의 권위(權威) 자체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회니시비(懷尼是非): 두 지명이 새긴 분열


이 사건 이후 두 사람의 관계는 완전히 끊어졌다. 송시열은 회덕(懷德)에 살았고 윤증은 니성(尼城)에 살았다. 사람들은 이 갈등을 두 지명의 첫 글자를 따 회니시비(懷尼是非)라고 불렀다.


이 사건은 개인적인 감정 싸움으로 끝나지 않았다. 기호학파(畿湖學派) 내부의 분열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송시열을 중심으로 한 세력은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인물로 규정하였다. 그들은 윤증을 배사적(背師賊)이라 부르며 강하게 비판하였다. 이들이 훗날 노론(老論)이 된다.


반면 윤증을 지지하는 세력도 생겨났다. 이들은 송시열의 태도가 지나치게 독단적이라고 보았으며, 학문적 권위(權威)가 절대적인 정치 권력(政治權力)으로 굳어지는 것을 경계하였다. 이들이 형성한 정치 세력이 소론(少論)이다.


한 학맥(學脈), 두 갈래 길


이렇게 하여 같은 기호학파(畿湖學派)에서 출발한 학맥이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노론(老論)은 명분(名分)과 절의(節義)를 중시하는 강한 성리학적(性理學的) 노선을 유지하였고, 소론(少論)은 보다 온건하고 현실적인 정치 태도를 지향하였다.


회니시비(懷尼是非)는 단순한 사제(師弟) 갈등이 아니었다. 그것은 조선 지식인 사회가 얼마나 엄격한 도덕 기준 속에서 움직였는지를 선명하게 보여 주는 사건이었다. 스승에게는 사실(事實)을 굽히지 않는 명분(名分)이 있었고, 제자에게는 아버지의 명예(名譽)를 지키려는 효심(孝心)이 있었다.


결국 두 사람 모두 자신의 가치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 완고한 신념은 한 학맥(學脈)을 둘로 갈라 놓았다.


조선 후기 정치사를 보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의 대립이 길고도 깊게 이어진다. 그러나 그 거대한 분열의 시작에는 한 스승과 한 제자의 갈등, 그리고 한 아버지의 묘갈명(墓碣銘)을 둘러싼 아픈 이야기가 조용히 자리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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