폼만 유림

논어도 안 읽은 유림

by 김희곤

오늘의 자칭 유림에게 권하노니, 글을 읽지 않고 유림이라 하는 것이 옳은가(勸今日自稱儒林者 非讀書而謂儒林 可乎)?


독서하지 않으면서 유림을 자처하는 것이 과연 옳습니까. 유림은 옷의 이름도, 갓의 높이도 아닙니다. 본디 경전의 숲에 머물며 도리를 익히고 수기치인(修己治人)을 고민하는 이들의 무리입니다. 공자는 배움의 기쁨을 먼저 말했고, 맹자는 의(義)라는 길과 예(禮)라는 문을 강조했습니다. 길을 모르고 문만 붙들고 서 있는 자가 어찌 집안의 주인이라 하겠습니까.


오늘의 현실은 참담합니다. 논어 한 줄 제대로 읽지 못하고 맹자 한 대목의 맥락도 모르면서, 유건에 도포를 갖춰 입고 향교를 드나듭니다. 제사 순서 외우는 것을 학문이라 여기고, 절하는 법 익힌 것을 도학이라 착각합니다. 남이 써준 축문을 더듬거리며 선현의 적통을 이은 듯 거드름을 피웁니다.


이것은 유림이 아닙니다. 이름이 바르지 않으면 말이 순하지 않고, 말이 순하지 않으면 일이 서지 않습니다(名不正則言不順). 공부 없는 유림은 이름을 도용하는 것이요, 선현에 대한 기만입니다.


뿌리 없이 잎만 달아 놓고 나무라 우기는 꼴입니다. 멀리서 보면 그럴듯하나 물을 빨아올리지 못하니 생기가 없고, 결국 말라 죽을 운명입니다. 겉모양은 있으나 속이 비었고, 예(禮)를 말하되 인(仁)과 의(義)를 모릅니다.


거꾸로 되었습니다. 본디 실질이 있으면 이름은 저절로 따라오는 법(有其實者 名自歸之)입니다. 그런데 오늘은 이름을 먼저 걸고 실질은 나중에 꾸밉니다. 묻고 싶습니다. 학이편(學而篇)을 끝까지 정독해 보았습니까. 양혜왕편에서 의(義)와 이(利)가 어떻게 갈라지는지 설명할 수 있습니까. 이 물음 앞에서 침묵한다면, 유림이라는 이름 또한 내려놓아야 합니다.


시대가 달라져 경전을 외울 수 없다는 변명은 반만 맞습니다. 모두가 훈고학자(訓詁學者)가 될 수는 없으나, 최소한 자신이 서 있는 전통의 문턱은 넘어야 합니다. 문턱도 넘지 않고 주인 행세를 하는 것은 희극입니다.


악보 없는 지휘자요, 지도 없는 안내자입니다. 인(仁) 없는 예(禮)는 껍데기뿐이며, 성(誠) 없는 충(忠)은 소음일 뿐입니다. 이런 허위는 젊은 세대로 하여금 유학 전체를 ‘옷 입고 절하는 연극’으로 오해하게 만듭니다. 가장 무서운 적은 밖이 아니라, 안에서 이름을 닳게 하는 자들입니다.


유림이 되고자 한다면 먼저 읽으십시오. 뜻을 모르겠거든 번역본이라도 잡고, 번역이 의심되면 주석을 찾으십시오. 유학은 문 앞에서 사진 찍는 이의 것이 아니라, 문을 열고 들어간 이의 것입니다. 그리고 부끄러워하십시오. 남 앞에 서기 전에 먼저 자기 앞에 서서 돌아보아야 합니다.


의관(衣冠)은 빌릴 수 있어도 학문은 빌릴 수 없습니다. 유림은 향교 마당이 아니라 책장 앞에서 시작됩니다. 논어의 첫 문장을 읽고 맹자의 한 구절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그 자리에서 시작됩니다. 더디더라도 그 길에 들어선 자는 이미 유림의 길 위에 있습니다. 그러나 한 걸음도 걷지 않고 이름만 취한 자는 영원히 문밖의 이방인일 뿐입니다.


자칭 유림들이여, 먼저 읽으십시오. 옷은 그다음이고, 이름은 맨 마지막입니다. 그때 비로소 당신의 도포 자락에서 생기가 돌 것이며, 당신의 절 한 번에 무게가 실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