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구멍이 사라졌다고요?
빨간구청 토목과 7급 주사 이벌건의 사무실은 언제나 민원의 냄새로 가득했다.
그의 책상은 서류 더미 속에서도 묘하게 정돈되어 있었는데, 이건 5년 차 공무원 생활이 그에게 가르쳐 준 생존법 중 하나였다. 언제든 문제가 터지면 관련 서류를 1분 안에 찾아낼 수 있는 비결이었다.
밤사이 생긴 돌발 민원은 없는지 신경을 곤두세우며 컴퓨터를 들여다보는 그의 눈빛에는 6급 승진에 대한 조급함이 서려 있었다. 그 조급함 속에는 풀리지 않는 난제 같은 민원의 피로가 깊게 배어 있었다.
이벌건은 이 조직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공무원 조직은 거대한 관료주의 성채였고, 그 안에서 살아남는 핵심은 단순하면서도 명료했다.
'나를 지키는 것.'
특히 다른 부서 일에 절대 휘말리지 않고, 내 책임 영역의 경계를 분명히 하는 것이 그가 지켜온 철칙이었다.
이벌건의 과도한 경계심은 과거 한 사건에서 시작되었다.
민원인이 '집 앞 가로수에 둥지를 튼 비둘기 때문에 잠을 설친다'라고 신고했을 때, 그는 별다른 의심 없이 환경과에 이첩했다. 그러나 환경과는 '야생동물 포획은 위생과 소관'이라고 떠넘겼고, 결국 '공공시설물 관리 소홀'이라는 이유로 모든 책임이 이벌건이 속한 토목과로 돌아왔다.
단순해 보였던 그 민원 하나로 그는 일주일간 해명서와 경위서 작성에 매달려야 했다. 그날 이후 그에게 모든 민원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숨겨진 시한폭탄이었다.
그래서 이벌건은 자신만의 노하우를 익혀갔다.
동료들은 '우리 골목에 노상방뇨가 심해요.', '식당 음식 냄새 때문에 미칠 지경이에요.'는 민원을 들으면 골치 아픈 '폭탄'이라 여기며 서로에게 떠넘기려 했다. 그는 부서 간 경계가 애매한 민원일수록 더 신중하게 접근했다. 어떤 부서로 넘길지, 어떤 근거 조항을 들어 반려할지를 치밀하게 계산했다.
그는 민원 유형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었다.
하나는 답이 뻔해 보이지만 민원인이 감정적으로 격양되어 빠른 처리를 재촉하는 '성질내는 민원'이었다. 이런 민원은 해결해도 돌아오는 것은 예상 가능한 결과뿐이었다. 그에게는 그저 시간과 에너지만 소모하는 일이었다.
다른 하나는 '조용한 민원'이었다. 겉보기에는 단순해 보이지만 의외로 정밀하게 조사하고 접근해야만 해결할 수 있는 까다로운 문제들이 숨어있었다. 이런 민원이야말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진짜 위험이었다.
이벌건은 두 유형 중에서 어쩔 수 없이 '조용한 민원'을 선호했다. '성질내는 민원'은 처리 과정에서 민원인과의 마찰이 불가피했고, 자칫 상급자에게 민원인의 항의 전화가 들어갈 위험이 컸기 때문이다.
'조용한 민원'은 위험하긴 하지만 신중하게 접근하면 조용히 처리할 수 있었다. 그는 이런 민원들을 천천히, 그리고 철저하게 분석했다. 치밀하게 계산하며 자신만의 처리 노하우를 축적해 나갔다. 이런 완벽한 처리 실력이야말로 6급 승진을 위한 그만의 무기라 믿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를 발견하는 것과 직접 해결하는 것은 별개였다.
그는 민원인이 던진 '숨겨진 폭탄'을 어떻게 안전하게 처리할지에 대한 자신만의 '폭탄 돌리기' 전략을 터득했다. 가장 확실한 방법은, 공사업체에 민원을 떠넘겨 책임을 통째로 돌리는 것이었다. 그는 관내 도로 정비 공사업체인 하얀 건설의 현장 소장인 백동수 과장과의 관계를 교묘하게 이용했다.
그날도 모닝커피가 입에 닿기도 전에 시청 도로사업과에서 전화가 걸려왔다.
팀원들이 모두 모인 사무실에서 전화벨이 울렸다. 모두가 긴장하며 서로 눈치를 살피는 가운데, 이벌건은 홀로 미소 띤 채 여유로운 표정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네, 이벌건 주사입니다."
"예, 노란 아파트 앞 도로에 있던 구멍이 하루 새 사라졌다는 민원이 국민고충처리위원회로 접수되었답니다. 어찌하다 시청 도로사업과로 내려왔는데, 아시다시피 관할이……."
"구멍이 사라졌다고요?"
전화기 건너편에서 들려오는 내용을 받아 적으며 이벌건은 속으로 빙긋 웃었다.
'이거, 재미있는 퍼즐이 될 것 같은데?'
이벌건은 황당한 민원 내용도, 그놈의 '관할' 타령도 여유롭게 흘려보냈다.
'구멍이 사라졌다'를 메모지에 휘갈기자, 마치 잠들어 있던 맹수가 사냥감을 발견한 듯 그의 얼굴에 묘한 전율이 희미하게 번졌다.
처음엔 단순한 해프닝으로 여겨졌다. 도로에 구멍이 사라졌다? 당연하지, 어제 아스팔트 포장을 했으니까.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니 이상했다. 왜 국민고충처리위원회까지 갔을까?
이벌건은 직감했다. 이 황당한 민원은 분명 그 이면에 복잡한 사정이 있을 거라고.
그는 이 민원을 '단순 민원'으로 처리하지 않고, '긴급 도로 시설물 점검'으로 분류했다.
이 우스꽝스러운 사안이 시청 도로사업과에서 내려왔다는 것도 그의 판단을 뒷받침했다.
"예, 감독님! 어쩐 일로 아침 일찍 전화를?"
백동수는 이벌건을 '감독님'이라고 불렀다. 공사 현장의 '대장'인 백동수조차도 서류 한 장으로 모든 것을 뒤엎을 수 있는 이벌건에게는 굽신거릴 수밖에 없는 관계였다.
"백 과장, 심각한 민원이 접수됐어. 현장에 가봐야겠는데."
이벌건은 '심각한'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강조했다.
노골적인 압박이었다. '노란 아파트 앞 도로'라고 말해주자, 전화기 너머에서 얕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민원이죠?"
이벌건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백동수 과장이 숨을 죽이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천천히, 음흉한 음성으로 말했다.
"구멍이 없어졌대."
"구, 구멍이요?"
백동수의 당황한 목소리를 들으며 이벌건은 확신했다. 늘 그렇듯 한마디를 툭 던지고는 전화를 끊었다.
"11시까지 구청으로 와."
전화를 끊고 나서 이벌건은 식어버린 커피를 보며 피식 웃었다.
상부에서 접수되어 내려온 민원이 오히려 다행이라 여겼다. 모든 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자신이 직접 이른 아침부터 민원인과 이런 내용으로 통화를 했다면 얼마나 갑갑했을까. 그는 민원서류를 꼼꼼히 살폈다. 민원인의 이름과 연락처는 물론, 민원을 제기한 날짜와 시간, 민원 내용에 담긴 사소한 단서들까지 놓치지 않았다. 모든 정보는 그가 민원인의 유형을 파악하고, 민원의 이면을 읽어내는 데 중요한 실마리가 되었다.
오늘은 좀 재미있는 하루가 될 것 같았다.
<다음 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