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없는회의

예전 제4조 회의(會儀)

by 구현

2026년.

서울 강남의 한 스타트업.

회의실.

AI 비서가 켜졌다.

실시간 데이터 분석기.


김 대리가

새로운 프로젝트를 제안했다.

"저희가 이 시장에 진입하면..."


AI가 끼어들었다.

화면에 숫자가 떴다.

"과거 유사 사례 분석 결과,

성공 확률 15%.

기각을 권장합니다."


1초 만에 결론.


김 대리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하지만 제 생각엔..."


팀장이 말을 끊었다.

"AI가 15%래.

다음 안건 가자."


회의 시간 3분.

다음 안건.


박 과장이 말했다.

"이 방향은 어떨까요?"


AI가 답했다.

"성공 확률 8%.

기각을 권장합니다."


박 과장은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서로의 얼굴 대신

화면을 봤다.


AI의 숫자가

권위가 됐다.

토론은 사라지고

확인만 남았다.


그들은 이것을

'데이터 기반 의사결정'이라 불렀다.


會儀之設 欲其序也

회의지설 욕기서야


"회의를 여는 목적은

질서를 바로잡는 데 있다."


회의(會儀).

함께 모여 의논하는 것.


정약용은 말했다.

회의의 목적은

질서(序)다.

질서는

높은 사람이 먼저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발언의 기회를 존중하고,

서로의 의견을 인정하는

태도의 체계다.


AI의 확신은 빠르다.

하지만

사람 사이의 질서는

만들어주지 못한다.


김 대리는

말할 기회를 잃었다.

박 과장은

의견을 포기했다.


AI가

그들의 발언을

1초 만에 차단했다.


容止抑揚 各中其節

용지억양 각중기절


"몸가짐과 말의 높낮이는

예절에 맞아야 한다."


정약용은 강조했다.

말의 내용만큼이나

'억양'과 '절도'가 중요하다.

상대의 의견이 나와 다를지라도

예우를 갖추어 듣는 것.


AI는

가장 효율적인 단어를 골라준다.


김 대리는

다음 회의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차피 AI가 결정하는데."

박 과장도 마찬가지였다.


肅然敬愼 民聽以莊

숙연경신 민청이장


"엄숙하고 조심하면,

듣는 이들이 장엄하게 여길 것이다."


정약용은 말했다.

회의의 무게는

결과물의 화려함이 아니라

참석자들이 보여주는

진지함과 공경에서 나온다.


화면 속 숫자에만 매몰된 회의는

장엄함을 잃는다.


사람들은

정답을 얻었을지 모르나,

서로를 향한 신뢰는

얻지 못했다.


6개월 후.

이 회사는

혁신적인 아이디어가

나오지 않았다.


팀원들은

회의에서

침묵했다.

"어차피 AI가..."


AI는

가장 빠른 결론을 내놓는다.

하지만

회의는

결론을 향한 질주가 아니라,

함께 길을 찾는 예법이다.


정약용은 AI 목민관에게 묻는다.

"당신의 회의는

정답만을 찾는가,


아니면

함께하는 이들의 존엄을

지켜주고 있는가?"



[내일 계속]

예전 제5조

작가의 이전글사람 좀 보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