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날이 도마를 두드릴 때, 세상이 제자리를 찾는다. 활활 타오르는 불 앞에서 칼은 현란하게 춤을 추고, 바다와 하늘과 땅의 재료들이 열기 속에서 새로운 맛으로 태어난다. 주방에서만큼은 마음이 평온했다. 칼날이 파를 썰어내는 소리, 된장이 끓는 냄새,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초등학교 4학년 늦가을,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이 그의 아스라한 기억 속에 희미하게 남아있었다. 새벽마다 영등포 청과시장으로 향하시던 구부정한 뒷모습, 악착같이 삶을 버텨내던 그 모습이 어린 그의 눈에도 무거운 현실로 다가왔다.
할머니가 돌아가신 후, 그의 집은 빛바랜 흑백사진처럼 색을 잃었다. 그때부터 아버지는 매일 저녁 밥상에 술병을 올렸다. 말없이 비워지는 술잔을 보며 그는 아버지 마음속 할머니의 빈자리가 얼마나 큰지 짐작했다. 술기운이 오르면, 아버지는 무언가를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 말들은 술의 쓴맛처럼 어린 그의 귀에 스며들었다.
그의 아버지는 어린 시절 할머니를 따라다니던 영등포 청과시장 근처에서 여전히 막노동꾼으로 살았다. 할머니에게서 배운 가족을 부양하는 일은 아버지 삶의 전부이자 벗어날 수 없는 굴레이기도 했다. 늦게 얻은 아들인 그는 더없이 소중한 존재였다. 비가 오고 추운 날이면 아버지 주머니는 텅 비었고, 집안에는 아버지의 한숨이 깊어졌다. 어머니는 맞벌이로 그 빈틈을 메우기 위해 새벽바람에 집을 나서 큰 빌딩 청소부가 되었다. 눈을 비비며 일어난 그의 눈에 텅 빈 주방은 너무도 허전한 공간으로 비쳤다.
그 허전함을 채우듯, 중학교에 들어갈 즈음부터 그는 부엌으로 들어갔다. 어머니가 끓여주던 된장찌개 맛을 냈고, 맛깔스러운 김치전을 아버지의 저녁 안주로 식탁에 올렸다. 요리에 타고 난 감각 덕분인지, 그의 손길은 처음부터 그렇게 서툴지 않았다. 어머니는 어느 날 그의 요리를 한 입 먹고는 국자를 든 채 한참을 말이 없었다.
"우리 아들이 엄마보다 훨씬 낫네."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아버지는 공부나 열심히 하라고 핀잔을 주면서도 맛깔스러운 안주에 소주 한 병을 금세 비웠다. 할머니가 억척스럽게 벌어서 사들인 작은 주택의 부엌은 그의 손길 아래 반들거리는 그만의 공간이 되어갔다.
아버지는 고된 일을 마치고 집으로 올 때면 늘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왔다. 그 속에는 청과시장에서 상품가치를 잃어 버려지는 과일이나 채소가 들어있었다. 검게 멍든 사과, 시든 무청이나 으깨진 감자 따위였다. 또래 아이들이 새로운 게임이나 과외 학원에 열을 올릴 때, 그는 버려진 존재들을 마치 퍼즐처럼 바라봤다.
짓무른 부분을 도려내고, 시든 잎은 찬물에 담가 생기를 찾아주었다. 폐기될 운명이었던 것들이 그의 손을 거쳐 새로운 요리로 변하는 과정을 통해, 단순한 흥미를 넘어선 깊은 성취감을 느꼈다. 그렇게 다양한 재료들을 다루며 그는 누구에게도 배우지 않은 자기만의 방식으로 요리의 세상으로 발을 들였다.
할머니가 그랬듯, 부모님이 그랬듯, 묵묵히 주어진 생활을 살아가는 것이 그의 성격이 되어갔다. 오로지 자신이 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몰두했다. 집에서 거리가 있어도 조리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졸업한 뒤에는 조리사 자격증을 앞세워 조리병으로 군에 입대하는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냈다. 그의 요리에 대한 열정은 그렇게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삶의 중심으로 자리를 잡아갔다.
입대를 며칠 앞둔 저녁이었다. 언제나처럼, 저녁상에 맛깔스러운 오징어무침과 부추전을 차린 아들을 아버지는 안쓰럽게 바라봤다. 처음으로 소주잔을 건네는 아버지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요새 군대가 많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항상 조심하고 조심해라. 그 취사장 일이란 게 많이 힘들 거다."
아버지의 걱정스러운 주름살에 그는 고개를 끄덕였다. 쉰 중반의 아버지는 늦둥이 외아들의 입대가 원망스러운 듯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걱정하지 마세요, 아버지. 너무 무리해서 일하지 마시고요."
"어디 가든 말조심해야 한다."
아버지는 한참을 망설이다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
"네 할머니가 늘 하시던 말씀인데."
빈 술잔을 내려놓으며 말을 이어갔다.
"네 할아버지는 지리산 자락 마을에서 양반이셨지. 토지도 많고 권세를 누리며 살았어. 그런데 전쟁이 터지고, 빨치산 때문에 산간 마을마다 피바람이 불었지. 빨갱이를 색출한다며 집마다 들이닥쳤어."
그는 아버지 술잔에 술을 채웠다. 아버지는 술잔을 들어 단숨에 비웠다.
"할아버지도 좌익과 연결되어 있다는 혐의를 받았는지, 어느 날 새벽에 끌려가셨어. 총소리가 들렸고, 할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으셨지. 그때, 네 할머니는 배 속에 나를 품은 채,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지고 아무것도 가진 것 없이 도망쳤어. 기차 칸 구석에 몸을 숨기고 무작정 도착한 곳이 영등포역이었지."
아버지는 잠시 고개를 돌렸다. 붉어진 눈가를 보며, 그는 늙은 아버지의 어깨가 너무 작게 느껴졌다. 허리가 휜 할머니의 작은 체구가 눈에 아른거렸다.
"네 할머니는 어떻게든 살아보겠다고 발버둥 쳤다. 아들에게, 집 하나는 장만해 주겠다고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시장에서 좌판을 열고 온갖 허드렛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이 집을 사셨다. 그렇지만 돌아가신 할아버지 생각에 눈물로 살다 가셨다. 고향에는 무서워서 가볼 엄두를 내지 못하면서도 밤마다 고향 생각에 몸서리를 치셨어. 명심해라. 어디를 가든 입조심하며 살아야 한다. 그냥 조용히 살다 가는 게 우리 같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그는 아버지 앞에 놓인 빈 술잔만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