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점등식. 3화

단본부 호출

by 구현

벗어날 수 없는 차가운 눈길들이 지치지 않고 나를 노리고 있었다. 상병 이하의 실질적인 군기담당, 식기당번들이 중대 최고의 고문관을 그냥 둘 리가 있겠는가. 그들은 끼니때마다 나의 암기상태와 그날그날 있었던 사소한 건수까지 국가안보적 차원의 문제로 승화시켜서는 동기들까지 싸잡아 윽박질렀다.


그들이 거머쥔 최고의 권한, 식사시간도 대폭 단축해 버렸다. 밥을 퍼서 식탁에 제대로 앉아서 먹은 기억이라고는 대기병일 때가 다였다. 배가 고팠다. 그렇지만 내가 제일 두려워하는 소리는 식사집합 구령이었다.


그 소리에 뒷걸음질 쳐 화장실에 숨었다. 떨리는 주먹으로 제멋대로 뛰는 멍청한 심장을 내려치며 소리 없이 울부짖은 날이 어디 하루 이틀인가.


막힌 변기.


절묘한 별명, 아니 내 이름이다. 그들은 내가 빠진 사실을 이내 알아챌 것이다. 변기를 뒤로 하고 식사집합 대열 마지막 줄에 합류한다.


출구를 잃어버린 절망, 다시 온몸으로 그걸 느낀다.


어떠한 희망의 싹도 용납하지 않는, 메마르고 삭아버린 이 퍼석한 땅에도 매서운 찬바람은 불어왔다. 12월로 접어들자 부대 전체가 긴장된 분주함에 휩싸였다. 매년 1월 중순께, 부대 전체가 임진강으로 이동하는 제법 큰 규모의 혹한기 훈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장들은 귀찮아했고 상병들은 두려워했다. 중대 단위 전투검열을 겸해, 중대마다 치열한 신경전까지 펼치며 교육훈련의 강도를 높였다. 훈련에 투입될 장비와 자재 정비로 야간작업뿐만 아니라 일요일에도 야적장으로 향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전투자재 정비가 한창인 자재야적장은 고참들에겐 간부의 눈을 피해 노닥거리기에 최적의 장소였다. 녹이 슨 장비를 둘러싼 찌든 먼지와 녹을 걷어내고 국방색 페인트를 칠하는 작업은, 별다른 간섭을 받지 않아 나로서도 마음이 편해 좋았다. 나는 철브러시와 그라인더로 녹 제거 작업을 하고 있었다.


고참들이 연신 담배연기를 뿜어대며 오늘 저녁 메인 반찬으로 나올 닭튀김에 얽힌 이야기에 열중하던, 바로 그때였다.


중대장 전령이 다급하게 야적장으로 뛰어왔다. 말을 제대로 잇지 못하는 숨찬 전령에게서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간파한 고참들은 몹쓸 물건을 내던지듯 피던 담배를 내동댕이쳤다.


"중대장님이, 노종호 이병을 찾으십니다."


"종호를...?"


중대장이 찾는 사람이 나란 사실에, 겨울바람을 미처 피하지 못한 곰의 무리처럼 움츠린 중대원들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전령에게 시선을 모았다.


"예! 단본부에서 노종호 이병을 긴급 호출한다는 공문이 중대본부에 왔습니다."


"단본부에서 종호를 왜 찾아?"


"이유는 모릅니다. 대개는 공문에 호출경위가 구체적으로 기재되는데, 그런 게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 중대본부가 비상입니다."


무거운 침묵과 어두운 시선이 나에게 몰렸다. 모두가 불길한 징조를 절감하는 눈치였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중대원들을 장악한 이 지독한 한기가 나로 인해 번져간다는 공포에 휩싸이며 어깨가 심하게 떨려왔다.


그때 누군가 나의 어깨를 부드럽게 감쌌다. 제대가 한 달도 채 남지 않은 이 병장이었다.


"종호야, 너 뭐 든든한 빽이라도 있냐?"


기막히게 정다운 속삭임에 나는 더욱 긴장하고 말았다.


"어, 업, 없습니다."


"그럼, 지난주 소원수리 적을 때..."


"뭐, 뭐든지, 꼭, 꼭, 적어야, 된, 다고, 해, 해서, 된, 된장국이, 좀 짜, 짜, 짜다고만, 저 적었습니다."


애써 참는 웃음소리가 여기저기서 삐져나왔다. 이 병장은 나의 경직된 어깨를 다독거리며 달래듯 말을 이었다.


"종호야, 네가 워낙 순진하고 아직 세상 물정에 서툴러서 이런저런 고통을 겪고 있는 걸로 알고 있다. 지금은 모든 게 힘들 거다. 나도 말이다, 너처럼 이등병 때 매일 탈영하는 꿈을 꾸었다. 그게 바로 엊그제 같은데 제대가 며칠 남지 않았잖아. 금방이다. 혹한기 훈련 끝나면 일병 진급하지, 그럼 바로 정기 휴가다. 군 생활이 다 그런 거야. 그리고 말이야, 중대장이나 상급부대에서 우리 생활을 세세히 알아서 좋을 게 없어. 달콤한 말들을 그럴싸하게 해대지만 어차피 군 생활은 우리끼리 하는 거잖아. 너도 머지않아 알게 되겠지만......"


중대장 전령의 다급한 목소리가 이 병장을 돌려세웠다.


"중대장님이 기다리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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