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 점등식. 9화

막힌 점등식

by 구현

김 상병이 점등스위치를 눌렀다. 그와 동시에 우리 두 사람은 바위덩어리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아무것도 켜지지 않았다. 눈동자를 스치고 지나가는 불빛마저도 없었다.


"이상하네..."


김 상병이 당황한 표정으로 스위치를 다시 눌렀다. 여전히 아무 반응이 없었다. 세상은 무서울 정도로 조용했다.


"종호야, 두꺼비집 확인해 봐."


나는 두꺼비집으로 달려갔다. 넓적한 퓨즈 중간이 뭉텅 녹아내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번졌다.


"퓨, 퓨즈가 끊, 끊어졌습니다."


"괜찮아. 퓨즈가 오래되어 그럴 수도 있어. 교회 건물이 워낙 낡았잖아. 예비 퓨즈가 있을 거야. 교회 막사 공구함을 뒤져봐."


김 상병의 목소리는 나를 달래듯 침착했다. 애타게 공구함을 뒤졌다. 3개의 퓨즈를 찾았다. 첫 번째 퓨즈를 갈고 스위치를 눌렀다. 퓨즈는 물에 풀린 휴지처럼 힘없이 녹아내렸다.


"또, 또 끊어, 졌습니다."


"뭐?"


김 상병의 목소리에 긴장이 서렸다.


"다시 해봐."


두 번째 퓨즈. 역시 똑같았다. 김 상병의 얼굴이 굳어졌다.


"빨리 원인을 찾아야 해."


마지막 퓨즈를 갈아 끼우려는 나에게 김 상병의 목소리가 날카로워졌다.


"퓨즈만 갈지 말고 원인부터 찾으라고!"


점등스위치에 전선을 연결하다 손을 베었었다.

'맞아, 그래서 전선 고정 나사를 엉성하게 조였을지도 몰라.'


잔디마당 중앙에 설치된 점등탁자를 향해 뛰었다. 제발, 제발, 제발. 머릿속엔 그 애절한 바람만이 숨 가쁘게 맴돌았다.


잔디마당에 들어서는 순간이었다. 묵직한 힘에 발목이 잡혔다. 잔디마당 가장자리에 설치된 녹색 철근을 반달 모양으로 쳐놓은 낮은 울타리에 발이 걸린 것이다.


너무 서둔 대가는 치명적이었다. 거칠게 넘어지고 말았다. 공구를 들고 있는 오른손이 접히면서 어깨까지 뜨거운 전율이 흘렀다.


머뭇거릴 여유가 없었다. 스위치로 달려가 덮개를 열려고 오른손을 뻗는 순간, 강한 전류에 감전된 것처럼 날카로운 통증이 솟구쳐 올랐다. 고통과 긴장에서 떨리는 두 손으로 겨우 덮개를 열었다.


전선은 너무도 단정히 자기 자리에 잘 고정되어 있었다. 머릿속은 새까맣게 타들어갔다.


김 상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뒤통수를 치며 달려왔다.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정신 바짝 차리고 원인을 찾아!"


"김, 김, 상병님. 전, 전구에 무, 문제가..."


"그게 무슨 소리야. 이제 와서 전구에 문제가 있다니."


김 상병의 어이없다는 표정에 말문이 턱 막히고 말았다. 메추리알만 한 전구를 다는 데만 며칠이 걸렸다. 가지런히 포장된 전구 꾸러미에 한 치의 의심도 하지 못한 잘못을 탓하기엔 너무 늦어버렸다.


'무슨 방법이 없을까?' 온갖 궁리를 쥐어짜는 동안에도 오른팔을 넘어 어깨까지 번져가는 통증이 머릿속을 잔인하게 헤집고 들어왔다.


"그렇게 넋 놓고 있으면 어떡해. 점등식이 바로 내일이야."


김 상병이 베풀어준 그 사랑에 꼭 보답하고 싶었다. 그런데, 어찌 이런 일이 생겼단 말인가. 김 상병의 아름다운 구상을 내가 이렇게 망쳐놓는 것은 아닌지, 너무도 두렵고 불안했다.


'그래, 이건 말도 안 된다. 나는 왜 이 모양 이 꼴인가. 학교 수업시간에 더 열심히 들었다면 능수능란하게 해결할 수도 있었을 건데. 도대체 나란 인간은...'


통증과 막막함으로 땀에 젖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순간, 짙은 어둠 속에서 작은 불빛 하나가 번쩍였다가 서서히 사라졌다.


'그래... 불량 전구의 스파크가 보일지도 모른다. 어둠 속에서는 선명하게 보일 것이다. 그걸 찾으면 된다.'


뜨거운 통증을 목구멍으로 집어삼키며 스위치 앞에 섰다. 서쪽 하늘로 햇살이 사라지고, 교회 주변은 벌건 어스름이 내려앉았다. 나에게 다가오는 김 상병의 굳은 얼굴이 차가워 보였다.


"김, 김 상병님. 퓨, 퓨즈가 끊,어질 정도면, 합, 합선된 불, 불량전구, 입니다. 어, 어두워지면, 그 전, 전구의, 스, 스, 스파크가 보일..."


김 상병이 어이없는 표정으로 내 말을 막았다.


"스파크? 어둠 속에서 불량전구의 스파크를 찾겠다고?"


그가 고개를 저었다.


"확실하고 분명한 기술적인 방법을 제시하란 말이다. 순간적으로 번쩍이다 사라지는 스파크를 무슨 재주로 찾아. 수백 개 전구 중에서 어떻게 찾는단 말이야. 퓨즈도 이제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아닙니다. 어둠 속에서는... 어둠 속에서는 그 짧은 순간도 보일 겁니다. 분명히 보입니다.'


하지만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았다.


김 상병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건... 이건 말이 안 돼. 도면대로 했잖아. 네가 확인했다며?"


"예, 예. 확, 확인, 했습니다."


"그럼 왜 이런 일이!"


김 상병이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잠시 후 고개를 들었을 때, 그의 얼굴에는 초조함이 가득했다.


"단본부 사람들한테... 행정실 형제들한테 뭐라고 말해. 내가 얼마나 자신 있게 이야기했는데."


그가 나를 쳐다봤다. 그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김 상병은 다른 무언가를 결심한 표정으로 어둑해져 가는 교회를 쳐다보며 말했다. 목소리가 차가워졌다.


"내일 아침에 외부에서 전기기술자를 데려와야겠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종호야, 너도 알겠지만..."


김 상병이 한숨을 쉬었다.


"이건 내게 정말 중요한 일이야. 점등식 준비하면서 단본부를 얼마나 들락거렸는지 너도 알잖아. 행정실 형제들한테, 소령님한테, 단장님한테까지 얼마나 자신 있게 말했는데."


그가 내 시선을 외면하며 말했다.


"이제 와서 실패했다고 하면, 그들이 나를... 어떻게 보겠어. 너는 중대에 복귀하면 끝이겠지만, 이 점등식은 무슨 일이 있어도 성공시켜야 해."


나는 김 상병에게 다가갔다. 한 번만 더 기회를 달라고. 어둠 속에서 빛이 보인다고. 스파크를 찾을 수 있다고.

하지만 말은 목구멍에서 맴돌았고 자꾸 눈물이 났다. 어깨를 움켜쥔 통증보다 더 심한 자책감이 내 심장을 압박해 들어왔다.


김 상병이 나를 쳐다봤다. 그의 얼굴에는 지쳐버린 실망감이 가득했다.


"종호야..."


그가 한숨을 쉬었다.


"넌 최선을 다했어. 나도 안다. 근데 이젠... 이젠 안 되겠어."


김 상병의 목소리가 명령조로 말했다.


"중대로 돌아가. 내일 아침 일찍 기술자를 부를 테니까."


"김, 김 상병님, 저, 저, 정말로..."


"됐어!"


그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감정을 억누른 듯 단호했다.


"이, 이제, 곧, 어, 어두, 어두워지..."


"말 더듬거리지 말고 그냥 가. 답답해 미치겠다."


그의 두 손이 내 어깨를 강하게 밀쳤다. 반사적으로 팔을 뒤로 뻗다가 점등스위치를 눌러버리고 말았다. 마지막 퓨즈가 끊어졌다.


두꺼비집을 확인한 김 상병이 돌아섰다. 그의 얼굴은 허옇게 질려 있었다. 그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다 갑자기 나를 돌아봤다. 그의 눈빛에는 분노와 절망이 뒤섞여 있었다.


"어서 가라고! 중대로 돌아가!"


김 상병의 화난 목소리가 떨렸다.


"중대에서 왜... 왜 널 막힌 변기라고 부르는지 이제 알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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