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농체육공원 산책이야기
집 앞 산책로를 걸어 한강 쪽으로 내려가니 붉은 백일홍 꽃밭이 눈에 들어왔다. 지는 백일홍이었다. 점차 시들어가는 꽃들이 선선해진 공기 속에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가을이 왔다. 선물처럼 찾아온 가을바람이 산책을 부추긴다.
아파트가 병풍처럼 둘러싸고, 큰 차들이 둔치에 주차되어 있는 이곳은 자연을 만끽하는 산책로는 아니지만, 평탄한 길은 그저 감사할 따름이다.
공원 한쪽에서 예초기 소리가 요란하게 들려왔다. 여러 작업반들이 풀을 베고 있었다. 백일홍 주변으로 자란 노란 꽃 무리들이 살벌한 소리와 함께 쓰러져 갔다.
벤치에 앉아 그 작업을 한참 바라보았다.
풀 냄새가 멀리까지 날아와 진동했다. 비린내 같았다. 베어진 풀들의 항변처럼 느껴졌다.
왕숙천 주변에서는 풀 베는 작업을 자주 볼 수 있다. 조금만 무성하다 싶으면 어느새 매끈하게 정리되고 만다.
"토끼풀이 다 사라졌네."
언젠가 아내가 클로버 잎을 찾다가 한 말이다.
쾌적한 산책로를 위해 풀은 베어진다. 뿌리가 남은 풀들은 금세 다시 자라고, 풀 베는 작업도 이어진다. 계절의 순환처럼 끝없이 반복되는 일이다.
정원의 주인공인 백일홍이 도도해 보인다. 베어지는 풀과 다른 운명을 뽐내듯 서서히 지고 있다.
같은 식물의 운명이 얄궂게 보인다. 풀로 태어났다면 나는 백일홍이 아니라 베어지는 풀일 것이다. 풀냄새가 점점 짙어져 벤치에서 일어났다.
풀 비린내가 계속 뒤따라왔다. 그 냄새 속에는 무언가 말할 수 없는 것들이 섞여 있었다.
가을이 왔다. 계절은 바뀌고, 풀은 베어지고, 사람들은 일하고, 나는 걷는다.
다시 보자, 들풀들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