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눈/ 글 공광규 /그림 주 리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그림책 표지가 인상적인 그림책입니다. 『흰 눈』은 공광규 시에 주리 작가가 그림을 그려 넣은 시화(詩畫)집 입니다. 겨울에 내리다 눈이 남아서 봄에 꽃눈이 내리다는 시인의 상상력이 참 좋았습니다.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이 폴폴 휘날려 매화나무 가지에 앉았다고 표현하고 있어요.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고,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조팝나무 가지에 앉아 있습니다. 여름에는 아카시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찔레나무까지 하얀 꽃 위에.
그렇게 앉다가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어진 눈은 마지막으로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만 알고 성긴 머리 위에 가만가만 앉았습니다. 저에게는 할머니 머리 위에 핀 흰 꽃이 그 어떤 꽃보다 아름답고 향기로웠습니다.
가만히 그림을 보고 있으면 할머니에게서 났던 은단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문득 할머니가 그리워집니다. 어릴 때 할머니는 베개처럼 두툼한 성경책을 펴고 한 자 한 자 써 가며 한글을 배웠습니다. 신기하게도 할머니가 가진 성경은 글자가 세로로 되어있었지요. 제게 글자를 물어보시면서 저를 선생님이라고 하시면 기분이 우쭐했습니다. 한글은 제게 배웠지만, 할머니는 모르는 게 없었습니다. 들에 피는 꽃 이름을 잘 알고, 소리만 듣고도 어떤 새가 우는지도 알았습니다. 제가 나뭇가지에 줄줄이 꾀어 놓은 곶감을 몰래 빼 먹은 것을 알았고, 뒤란에 있는 장독을 깬 사람이 동생이라는 것도 금새 알아챘습니다. 그래도 할머니에게 혼난 기억은 나지 않습니다. 언제나 불룩한 배에 꽉 끼는 조끼를 입고 저를 꼭 안아주셨습니다. 할머니 품에 얼굴을 파묻고 있으면 나던 은단 냄새가 푸근하고 좋았습니다.
미당 서정주가 이런 시를 썼습니다. 몹시 우울한 날이었겠지요.
괜, 찮, 다, ……
괜, 찮, 다, ……
괜, 찮, 다, ……
괜, 찮, 다, ……
수부룩이 내려오는 눈 발속에서는
시인은 진흙이 잔뜩 묻어있는 신발로 눈 위를 걸어도 괜찮다고 말해줍니다. 더러워진 발자국을 곧 흰 눈이 깨끗하게 덮어줄 테니까요. 때로 우리는 미숙하기 때문에 실수를 하고, 마음으로 원하는 것과 달리 악을 저지기도 합니다. 그럴 때면 스스로를 무섭게 몰아세우며 슬퍼합니다. 20대에 마음이 괴롭고 아플 때 읽었던 시라 그 시인이 어떻게 살았던 상관없이 마음에 쑥 들어와 자리를 잡았습니다. 오늘 같이 울적은 날에는 ‘괜찮다, 괜찮아.’하시면서 꼭 끌어안아주셨던 할머니 품이 그립습니다.
2022. 11-12월 생명샘 칼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