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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너는 나랑 살자

밀려났지만 슬퍼할 필요는 없어

by 하늘기쁨



며칠 전 큰 딸이 방을 정리했나 보다.

버려야 할 몇 가지를 방 앞에 내놓았는데, 쓰레기 더미 맨 위에 오래된 곰인형이 엎어져 있었다.

참 오래도 되었다. 이 곰돌이가 아이들을 만난 것이 아마 적어도 15년은 되지 않았을까...

시간이 흐른 만큼 색도 많이 바래고, 부드러운 감촉도 다소 사라지고, 털은 어지러이 뒤엉킨 모습이었다.

아이들이 얼마나 안고 다니고 뒹굴고 했는지.. 그동안 살도 홀쭉 빠져 버려서, 방문 앞에 축 쳐져 엎어진 모습이 어쩐지 측은하기도 했다.


그래도 우리가 같이 산 세월이 얼만데...

이대로 보내버리기엔 아쉬워서 살짝 품에 안아 일으켰다.

그리고 어디.. 예전 만은 못해 보이지만 아직 앉아 있을 힘이 있을까 궁금해서 식탁 끝에 한번 앉혀 보았다.

앉히면 그대로 넘어갈 것 같았는데 놀랍게도 그 불안한 식탁 끄트머리에 꼿꼿하게 버티고 있는 녀석...


녀석의 눈은 여전히 선하고 사랑스럽고

비스듬히 기울어진 채 앉은 모습은 "보세요, 아직 저는 이렇게 잘 앉아 있을 수 있어요." 말하는 것 같았다.


"그래, 일단 목욕부터 먼저 하고, 이제 너는 나랑 살자."

가슴에 꼬옥 껴안았더니 오래 잊고 있었던 부드러운 그 감촉이 기분 좋게 느껴졌다.





이 보라색 곰돌이는 평소 우리 딸들을 이뻐해 주시던 교회 집사님이 선물해 주신 것이다.

보통 곰돌이 인형은 하얀색, 갈색, 검은색 등이 대부분인데 이 녀석은 특이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연보라색이라 첫눈에 내 맘에 쏙 들었다.


그리고 지금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지만 원래는 아주 멋진 깔맞춤의 리본 넥타이 장식도 있었고, 안기는 감촉이 그 어떤 곰돌이 인형들보다 더 부드러웠다. 무엇보다 이 곰돌이를 사랑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약간 멍한 듯하면서도 선하고 사랑스런 눈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

아이들도 물론 이 곰돌이를 사랑했지만 사실은 내가 더 이 아이를 좋아라 했는지 모르겠다.


아이들은 어렸을 때 이 곰돌이를 안고 잠이 들곤 했다. 주로 큰 딸의 차지였던 것 같다.

먼 길 여행을 갈 때도 여러 번 데리고 다닐 정도로 아이들의 사랑을 듬뿍 받았지만

아이들이 커 가고 새로운 곰돌이 인형들이 집안에 생기게 되면서 언제부터인가 녀석은 아이들의 침대에서 밀려났고, 서랍장 위에 장식용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신세가 되었다.


인형을 엄청 좋아하는 큰 딸은 다른 인형들을 선물 받기도 하고 인형 뽑기 기계에서 뽑은 인형을 데리고 들어오기도 해서, 한때는 아이의 침대 가득 인형으로 채워진 적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정기적으로 인형들을 정리, 처분을 해 줘야 하는데 그런 때마다 이 녀석은 운 좋게 처분 대상에서 제외되어 왔었다. 그만큼 이 곰돌이에 대한 애정이 컸다는 말인데, 결국 이번에 처분을 피하지 못하고 방 밖으로 쫓겨난 것은 아마도 더 이상 애정 1순위를 차지하기 어려울 만큼 강력한 상대를 만났기 때문이 아닌가 짐작이 된다.

연애를 시작한 큰 딸 남친이 선물한 커다란 강아지 인형 앞에서는..







이 낡은 곰 인형을 품에 안고 털을 가다듬어 주다 보니 문득 이 녀석이나 나나 참 비슷한 처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너 예전 같지 않구나, 왜 이렇게 털이 거칠어지고 몸에 힘도 없어졌니? 너 늙은 거야?"


그러게.. 내가 이렇게 나이 들어가는데 너라고 다를 것이 있겠니.. 우리 이제 보니 같이 늙어가는구나,

갑자기 측은지심과 연민의 마음이 가슴 저 깊은 곳에서 올라오기 시작했다.



"너 아이들 방에서 밀려난 거야? 나랑 비슷하네. 나도 밀려났거든."

이쯤 되니 피식 웃음이 나왔다.


아이들이 어릴 때는 엄마가 세상의 중심이고 언제나 엄마가 제일이다. 홈스쿨을 하면서 어린 두 딸이 엄마인 나로 인해 자라고 안정감을 누리는 것을 보는 것은 인생 최고의 보람이었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아이들의 공간 안에 새로운 많은 것들이 들어오기 시작하고 자연스럽게 내가 밀려 나오는 것 같은 경험을 피할 수가 없었다.


아이들은 더 이상 비밀을 엄마와 공유하지 않았고, 엄마도 모르는 비밀을 친구들과 나누기 시작했고, 나도 모르는 아이들의 은밀한 마음의 소리를 교회 선생님이나 아이들이 믿고 따르는 '이모'인 내 친구로부터 듣는 일도 생겨났다.

언제든지 들어가서 이것저것 정리해 주던 아이들의 방에도 이제는 노크를 하고 허락을 받지 않고는 들여다볼 수 조차 없어지면서 결국은 낡은 곰돌이처럼 방밖으로 밀려 나오고 아이들의 방문은 내 눈앞에서 굳게 닫혀버리게 되었다.


지금은 그것이 아이들이 건강한 자아를 가진 사람으로 성장해 가는 자연스러운 과정이었다는 것을 이해하지만, 당시 나는 이런 과정에 대한 아무런 지식도 없었고, 그 어떤 준비조차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에

꽤 오래, 많이 힘들어하는 시간을 보냈던 것 같다.

홈스쿨을 하면서 내가 기대한 것은 아이들이 언젠가는 부모의 곁을 떠나 자신의 삶을 스스로 건강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엄마로서 최선을 다해 도와주는 것이었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모든 것이 하나로 똘똘 뭉쳐 있던 몸에서 팔다리가 찢어져 나가는 듯한 아픔을 겪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처음 밀려났다고 생각했을 때는 너무 슬프고, '나'라는 존재가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지만...

밀려나야 한다. 그게 정상이다. 아이들이 자라 갈수록 부모는 점점 아이들의 세계에서 뒷걸음쳐 나와 언젠가는 기꺼이 아이들의 방문을 내 손으로 살며시 닫아 줄 수 있어야 한다(아, 좀 더 폼나게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아쉽다..).


그리고 그 문 너머에서 엄마 없이도 스스로 새로운 문을 열고, 새로운 관계를 맺어 가면서 풍성한 자신의 세계를 개척해갈 힘을 우리 아이들이 가지게 되었다면 엄마로서의 소임을 다한 것이 아닐까...


아직도 여전히 한 없이 부족한 엄마이지만 자신의 일에 열심히 몰두해 있는 아이들의 뒷모습을 더 자주 보게 되는 요즘, 이따금 "너희 네 남매 한 집에서 같이 밥 먹고 한 방에 같이 자고 하던 그때가 엄마는 제일 행복했다." 하시던 친정 엄마의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알 것 같은 나를 이렇게나마 위로하려고 한다.



"밀려났다고 슬퍼할 필요는 없어. 원래 그런 거야. 그래도 너는 너의 소임을 다했잖니."


같은 위로로 낡은 곰돌이의 마음을 토닥여 주었다. 우리 아이들이 엄마, 아빠 방에서 나와서 처음으로 방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낯설고 무서운 밤을 아이들 품에서 함께 지내준 고마운 곰돌이, 그 많은 밤을 함께 보내며 용감하게 혼자 잠드는 법을 배우기까지 힘이 되어준 곰돌이, 그만하면 소임을 다한 거다.



"아이들은 자라고 이제는 더 이상 전과 같은 관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우리를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야, 진짜라니까."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딸에게 물었다.


"이 곰돌이 버리려고 내놓은 거야?"

"아니에요.. 버리다니요.. 세탁해서 어디 놔두려고 그런 거예요."


둘째가 옆에서 거든다.

"걔는 우리 유물이잖아요, 버리지 마세요~"

"그럼, 목욕시켜서 이제 엄마가 데리고 살아도 돼?"

"하하하, 엄마가 데리고 사세요~!"


거봐... 밀려났지만 여전히 아이들은 너를 사랑하지?





그래, 소임을 다 했으니 이제 즐겁게 살면 된다.

조금 전 곰돌이는 목욕을 다 마치고 몸이 마르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다음번에 외출을 하면 예쁜 리본을 사서 다시 장식을 해줘야겠다.

그리고 잘 보이는 곳에 두고 한 번씩 껴안아 줘야겠다. 이 녀석의 감촉은 아직도 정말 부드럽고 편안하다.

머지않아 아이들은 직장으로, 공부로, 결혼으로 집을 떠나겠지만

그럴 때에도 아이들의 빈자리에서 따뜻했던 기억을 함께 나눌 행복한 곰돌이로 오래오래 있어주길...





좀 낡았지만 여전히 행복한 곰돌이로 다시 시작하는 거야!



#별별챌린지

#글로성장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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