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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의 공감 공부

딸을 통해 배웁니다

by 하늘기쁨



오랜만에 여유가 생긴 큰 딸과 바닷가 산책을 했다.

매일 한 집에서 자고 깨고 먹고 하지만 이렇게 같이 한가롭게 걷는 것은 어느새 까마득히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낯선 풍경이 되었다.

바다를 따라 걷다가 햇볕이 잘 드는 풀밭이 비스듬히 바다를 향해 누워있는 곳에 이르자 그곳이 딸아이의 마음에 쏙 들었나 보다.


"아, 멋지다~ 이런 데다 집 짓고 살고 싶다~~"


먼지 만한 날벌레 하나조차도 겁이 나서 한 여름이면 풀밭 근처도 안 가려고 하면서도

아이러니하게도 언젠가는 시골에 가서 집을 짓고 살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하는 딸아이라

이곳이 아이의 정서에 딱 맞는 곳인가 보다 하면서도 무심하게 툭 내뱉듯이 대답을 했다.


"안돼, 여기는 바로 바닷가라.. 태풍 와봐, 다 날아가버려..."

"그렇긴 하겠다.."

아이도 그다지 개의치 않고 내 말에 동의하듯 대답했다. 아주 현실적이고 실제적인 문제 제기를 한 것이라 이견의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아이의 대답이 끝나자마자 내 입에서는 '아차..!!' 하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노력해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도 나는 딸아이에게 공감해 주는 능력이 약간 부족한 엄마가 아니었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이다.


"딸, 엄마가 또 그런다 그치? 지금 당장 집을 짓겠다는 것도 아닌데, '야, 참 좋겠다, 그림 같은 집이겠네...' 그렇게 맞장구 쳐주면 될걸... 엄마는 너무 현실적이다."


"하하, 맞아요, 엄마는 해저 캡슐 호텔 보고도 남들이 멋지다 할 때, 저거 유리창 깨지면 사고 난 다고 말했잖아요."

내가 그랬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천정이 바닷속이 훤히 보이는 유리로 되어 있는 구조물이라면 그렇게 말하고도 남는다, 나라는 사람은...






딸과 이런 대화를 나누다 보니 오래전 일이 하나 떠올랐다.

내가 처음으로 오늘처럼 큰 딸을 통해 공감의 대화를 하는 법을 배웠던 일이었다.


큰 딸아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종일 같이 집에서 배우는 우리에게는 모든 일상이 배움의 터전이었다.

나는 엄마로서 아이들이 한순간도 놓치지 않고 바른 가치와 태도를 배우게 하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기울였었다. 원래부터 모범생이라는 소리를 듣던 나는 아이들을 바르게 키우기 위해 분명한 기준과 원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그런 것들을 아이들과 자주 공유하면서 실천을 하도록 했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해 마트에 갈 때도 우리에게는 원칙이 있었다.

먼저는 그날 사야 할 것을 미리 의논해서 적어 가기

그리고 그것 말고 즉흥적으로 좋아 보이는 것, 사고 싶은 것을 사지 않기

그런 것이 보일 때는 이것이 정말 필요한 것인지 생각해 보고 필요하다면 다음번 구매 시에 구입하기 등


나에게는 이런 원칙이 아이들로 하여금 용돈을 관리하고, 필요한 것들을 적시에 구입하는 합리적인 경제 습관을 갖게 해주고 욕구를 절제하고 스스로 다스리는 자기 훈련을 하도록 도와줄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리고 실제로 마트에 가면 계획한 물건 외에 다른 것을 구입하는 것은 엄두도 못 내는 일이었고,

두 아이는 그런대로 우리의 익숙한 원칙에 따라 잘 자라 가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도 아이들은 아이들인지라, 눈에 띄는 것들을 발견하면

"아, 맛있겠다.", "엄마, 이거 봐요, 이거 사면 안 돼요?"하고 물어보지만 나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오늘 그거 사는 거 아니지? 그건 다음에 사자."

조금 실망하는 눈치지만 이 순간을 이겨내야 한다 는 마음으로 아이들을 토닥이고,

나 자신 스스로를 잘하고 있다고 자부하던 어느 날,

그날도 함께 구입 리스트를 들고 마트를 갔었는데, 큰 딸이 눈길을 확 끄는 화려한 머리띠에 그만 반해버리고 말았다. 커다래진 눈을 머리띠에서 떼지 못하고 감탄에 또 감탄을 연발했다.


"우와~~ 이거 진짜 이쁘다~~"

이번에도 엄마의 반응은 매 한 가지였다.

"그거 오늘 살 거 아니지? 다음에..."


"그냥 이.쁘.다.고요!!"

순간 딸아이가 나를 향해 홱 돌아서서 원망 가득 섞인 투로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늘 조용히 말 잘 듣던 아이가 그렇게 반항심 가득한 말로 대든 것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하고 당황스러웠다.

그렇지만 다행히도 그 짧은 찰나의 순간에 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고 아이에게 조심스럽게 이럴 때 엄마가 어떻게 대답하길 바라는지를 물어 보았다.


"내가 사달라고 한 게 아니잖아요. 그냥 이뻐서 이쁘다 한 건데, 엄마도 '아 진짜 이쁘네' 하고 말해주면 안 돼요?"

또박또박 마음 안에 있는 것을 잘 전달해 준 딸 덕분에 그날 내가 깨달은 것이 참 많았다.

엄마의 확고부동한 원칙을 알기에 착한 마음으로 잘 따라주었지만

과연 아이들은 마트에 오는 것이 즐거웠을까...

좋은 원칙이 바른 기준을 가지고 자라도록 돕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나친 원칙주의는 불필요한 긴장을 야기하고 자유롭게 표출되어야 할 감정의 자유를 억압할 수도 있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내가 먼저 아이들과 쇼핑하는 즐거움을 배웠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 이후로는 구입 리스트는 항상 미리 작성을 하고 가지만 거기에 얽매이지 않기로 했다.

아이들과 사야 할 것만이 아니라, 이쁜 것, 신기한 것, 새로운 것을 같이 구경하면서 감탄하고 조잘대면서 시간을 보내보니 아이들과 이야기할 것, 공감할 것이 더 많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때로는 구입 리스트에 없는 것이라도 아이들이 너무 좋아하고 먹고 싶어 하는 것은 한번씩 '충동구매'도 해보았다. 예기치 않은 것을 마트에서 만나서 마음이 빼앗기고,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그 자리에서 구입해서 안고 돌아오는 즐거움도 쇼핑의 즐거움, 살아가는 즐거움 중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매번 우리의 구매 습관이 충동구매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면 그 정도는 아이들 스스로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 것이라 신뢰해 주고 나니 쇼핑을 가는 나의 마음도 덜 긴장스럽고 아이들도 신나 하는 것 같았다.


나와는 다른 성향을 가진 우리 큰 딸, 상상력이 풍부하고, 작은 것에 잘 감탄하는 딸아이가

원칙주의자 같은 엄마 때문에 참 힘들었을 것 같다.

그러나 이 일을 겪으면서 아이들을 자라게 하는 것은 원칙과 기준만이 아니라

공감해 주는 마음과 일상의 즐거움이 더욱 아이들을 풍성한 마음을 가진 사람으로 자라게 한다는 것과

우리의 홈스쿨이 지향해야 할 가정의 문화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딸을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우리가 설정한 원칙들 중에서 꼭 필요한 것 외에 불필요하다 싶은 것들의 거추장스러운 벽들을 허물고

서로의 감정을 받아들이고 언어 이면의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법을 배운 것은 나에게도 긴장으로 굳은 몸과 마음의 근육을 풀어 자유를 누리게 하는 경험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잘 배워 왔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나의 반응을 보니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 든다.

타인의 말과 감정에 귀를 기울이고, 공감의 대화를 하는 법은 평생을 배워가야 할 과정이고

생각보다 지난한 과정이라 할지라도 정말 가치 있는 일일 것이다.

아직 멀었어도 괜찮다, 계속 배워가면 될 테니...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목련 꽃 봉오리가 하얗게 흔들거리는 작은 나무가 너무 사랑스럽고 이뻐서

주머니에 있던 핸드폰을 꺼내 사진을 찍었다.


"엄마, 꽃이 활짝 핀 나무, 우리 아파트 마당에 있는데... 그거 찍지?"

"아직 봉오리인 채로 있는 게 이뻐 보여서... 열심히 꽃을 피우려고 애쓰는 게 이쁘지 않아?"

"그러네, 봉오리도 이쁘네~"


말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속으로 딸에게 속삭였다.

'너도 이 봉오리 같아, 열심히 꽃을 피우려고 애쓰고 있는..'


아직 너에게 많은 시간과 경험할 일들이 있으니 너 만의 꽃을 활짝 피우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 옆에서 더욱 공감하는 말과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무한한 지지를 아끼지 않는 엄마가 되리라 속으로 다짐했다.



''딸아, 너의 생각이 참 멋지구나..

이다음에 바닷가 언덕에 이쁜 집을 짓고 싶다는 꿈이 꼭 이루어지면 좋겠다.

태풍은.. 그때 가서 생각하고 대비해도 늦지 않으니

태풍 따위에 겁먹지 말고 마음껏 꿈을 꾸고 꽃을 활짝 피우는 우리 딸이 되길 엄마가 기도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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